2024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정복혜 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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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7-06 ㅣ No.1303

[124위 시복 특집] 정복혜 칸디다(?-1801)


“천주교를 믿으면 평소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가족같이 서로 도와준다. 너는 형제가 없어 외로울 터이니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 과부’라고 알려진 정복혜 칸디다는 서울 전농동 근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혼인 후에도 한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790년 무렵 이합규를 만나 천주교 신앙을 접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아 입교하였습니다. 이후 정복혜는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면서 친정 오빠와 아들을 입교시켰습니다. 또 과부가 된 뒤에는 양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수많은 부녀자들에게 선교하였습니다. 정복혜는 교우들이 만든 교회 서적을 팔거나, 신자들 사이의 연락을 도맡으며 때론 교리를 강습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대부분의 초기 순교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녀에 대한 전기적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의 아들 윤석춘에 대한 포도청 신문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집니다. 천주교를 믿으라고 권하는 어머니에게 어느날 윤석춘이 “천주교를 믿으면 어떤 이로움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정복례가 대답했습니다. “천주교를 믿으면 평소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가족같이 서로 도와준다. 너는 형제가 없어 외로울 터이니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는 그 무렵 천주교를 선교할 때 대개 두 가지를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죽은 뒤 좋은 곳(천당)으로 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는 이웃 사랑의 정신입니다.

한편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복혜는 먼저 성물과 서적을 한신애의 집에 숨겨 두고 교우들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활동들 때문에 얼마 안 되어 그녀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2월 포졸들이 한신애를 체포하면서 모든 교리서를 압수하였고, 정복혜도 곧이어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때 형조에서는 일단 정복혜를 포도청으로 옮겨 문초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형조로 데려와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그 동안의 행적을 추궁하고 배교를 강요하였습니다. 정복혜는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곧 이를 뉘우치고 자신이 한 일을 떳떳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1801년 5월 1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습니다. 당시 형조에서 정복혜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수많은 부녀자들에게 선교하여 입교시키고,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모아 한신애의 집에 묻어 두었다가 박해가 지난 뒤 다시 천주교를 전파하려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7월 6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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