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홍낙민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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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6-30 ㅣ No.1298

[124위 시복 특집] 홍낙민 루카(1751~1801년)


“이제 나는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한때 가성직제도의 신부로 활동한 홍낙민 루카는 178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섰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로 임금 정조에게서 경고를 받자 홍낙민은 천주교를 멀리하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그는 여전히 기도 생활을 하며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재(齋)를 지키기도 하였습니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것이 발각되어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홍낙민은 두려운 나머지 “천주교의 폐해는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여 철저하게 금하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에 큰 화가 될 것”이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주교 신자임을 알고 있던 정조는 “공직에 있는 자는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임금에게 말해야 한다.”며 솔직하지 못한 홍낙민을 책망하였습니다. 한편 시간이 지나면서 홍낙민은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1799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도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천주교를 멀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홍낙민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는 처음부터 나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혹독한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는 동안 홍낙민은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여 유배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이전에 보이지 않던 용덕(容德)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재판관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지난날에 한 모든 것은 비겁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던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또 매질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니, 저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모두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용감하게 죽고자 합니다. 제가 섬기는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의 주재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하느님을 위하여 죽고자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렵니다.”

고문으로 몸이 으스러지면서도 홍낙민은 “이제 나는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끝내 사형판결문을 받아든 그는 “이제 내가 받을 죽음은 이전의 배교에 대한 벌이므로 기꺼이 받겠다.”며 흔쾌히 서명하였습니다. 홍낙민은 1801년 4월 8일 명도회 회장 정약종, 총회장 최창현 등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교황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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