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대구지역 순교자: 구성열 바르바라의 순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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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6-23 ㅣ No.1295

[대구지역 순교자 20위의 삶을 묵상하며 - 대구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심지(心地)가 반듯한 분


구성열 바르바라(?-1816)의 순교 이야기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사람이 있다. 나한테 잘해준 것도 없고 말도 붙이지 않는데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있는 듯 없는 듯 드러나지 않게 자기 맡은 일을 묵묵히 하시는 분…. 특히 본당에서 봉사하는 어머니들 가운데 그런 분이 많은 것은 왜 그럴까? 다들 수줍어하시면서도 심지(心地)가 얼마나 반듯한지…. 순교자 구성열 바르바라의 모습과 그런 어머니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충청도 홍주 출신인 구성열 바르바라는 본래 성격이 온화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덕행이 남달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한 그녀는 첫 남편을 잃고 서석봉 안드레아에게 개가하였다. 그 후 바르바라 부부는 사위인 최봉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체포될 당시 그녀는 심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이를 잘 이겨냈다. 하지만 다시 삼모장으로 맞는 참혹한 고통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배교할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때 그녀의 사위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며 끊임없이 권면하자 다시 힘을 얻은 후 하느님을 위해 함께 목숨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배교의 유혹이 사라짐으로써 그녀는 갖은 고문 속에서도 굳건하게 견딜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사위 그리고 다른 교우들과 함께 다시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감영으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지만 끝까지 견뎌냈다. 17개월이 넘는 힘든 옥중 생활 도중에 남편과 사위가 먼저 옥사하는 인간적 아픔까지도 감수해야 했으니 하느님께 대한 그녀의 마음은 특별했으리라. 1816년 12월 대구 형장에서 순교할 무렵 그녀는 약 40세였으며 참수 전 마지막 기회를 준 관장에게 다음의 말을 남겼다. “예수 마리아께서 저를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빨리 하늘로 올라오라고 초대하시는데, 어떻게 제가 덧없는 이 목숨을 보존하고자 배교를 하여 하늘의 영복을 잃겠습니까?”

순교자 구성열 바르바라님!
때론 흔들리지만 저희도 반듯한 심지로 묵묵히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2014년 6월 2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대구주보 4면, 글 대구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그림 김효애 크리스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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