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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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6-23 ㅣ No.1293

[124위 시복 특집]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년)


“내가 물을 청한 것은 나의 위대하신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오.”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교회사」에 기록된 정약종의 최후는 다음과 같습니다.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의 얼굴은 아주 빛났다. 도중에 수레 끄는 사람을 불러 목이 마르다고 하였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나무라자 그는 “내가 물을 청한 것은 나의 위대하신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옥중과 법정에서 지치지 않고 전도를 한 그는, 그의 순교 장소도 매우 웅변적인 강단(講壇)으로 만들었다. 형구(形具) 앞에 앉아 그는 그것을 행복스럽게 들여다보고 나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높여 외쳤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무한히 흠숭하올 천지만물의 대주재(大主宰)이신 이가 당신들을 창조하셨고 보존하십니다. 당신들은 모두 회개하여 당신들의 근본으로 돌아와야 하오. 그 근본을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거리로 삼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거리가 될 것입니다.”

형리들이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하니, 그는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였다. 망나니는 벌벌 떨며 감히 치지 못하였다.」

1801년 4월 8일, 41세를 일기로 순교한 정약종은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 정약전, 정약용 요한의 형제입니다. 또한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 가롤로와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자녀들입니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약종은 자주 한양에 가서 성사를 받았고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또 오랫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두 권을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주신부의 승인을 받아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한편 주신부는 평신도들의 교리연구 및 전교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하고 정약종을 초대회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황사영은 「백서」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정약종은 특히 철학과 종교 연구를 즐겨하였다. 교리의 어떤 점이 분명치 않게 생각될 때에는 그것을 연구하느라 침식(寢食)을 잊고 그것을 밝혀내기까지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가거나 집에 있거나 말을 타거나 배를 탈 때에도 깊은 묵상을 그치지 않았다.”

서울대교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6월 2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서울주보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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