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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대구대교구 순교자 20위1: 병인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정해박해의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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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6-16 ㅣ No.1290

한국순교자 124위 시복을 앞두고 - 대구대교구 순교자 20위 ① 병인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정해박해의 순교자들



오는 8월 아시아 청년대회를 위해 방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의 시복식이 거행된다. 이날 대구대교구 또한 20위 순교자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김시우 알렉시오, 최봉한 프란치스코, 서석봉 안드레아, 김희성 프란치스코, 구성열 바르바라, 이시임 안나, 고성운 요셉·고성대 베드로 형제, 김종한 안드레아, 김화춘 야고보(이상 을해박해:1815년, 순조 15년 경상도 지방에서만 발생한 천주교 박해), 박경화 바오로, 김세박 암브로시오, 안군심 리카르도(이상 정해박해:1827년, 순조 27년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이재행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이상 기해박해:1839년, 헌종 5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로 기해사옥이라고도 한다.),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이상 병인박해:1866년, 고종 3년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가 시복된다.

대구대교구는 20위가 포함된 124위 순교자 시복을 앞두고 5월 17일(토)부터 12월 31일(수)까지 관덕정 순교기념관과 복자성당, 그리고 경주 진목정 성지를 교구 순례지로 지정하고 이 기간 내에 전대사 조건을 이행한 후 이들 순례지를 방문할 경우 전대사를 받는다.


병인박해의 순교자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을 기념으로 1970년에 축성된 복자성당은 대구대교구 신자들의 성금으로 지은 첫 성당으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본당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성당 외관은 김대건 신부가 황해를 건넜던 배 모양으로 앞쪽이 좁고 뒤가 넓은 유선형 모양과 둥근 곡선을 이루고 있는 지붕의 처마 끝과 종각은 각각 뱃전과 돛대를 닮고 있다. 또한 병인박해 때 울산 장대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 세 분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세 분 순교자의 시신은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경주 진목정에 합장했다가 1932년 감천리 묘지로 이장한 후 1974년 10월 현재의 복자성당에 모셔졌다.

죽령 교우촌(현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은 회장이었던 이양등과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김종륜, 허인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 곳으로 이양등은 본래 성품이 선량하고 수계생활을 열심히 했다. 김종륜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평소 화목함을 강조하여 어느 누구하고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허인백은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24세 때 천주교에 입교한 후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여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고 아내 박조이와 자녀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고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겸손과 인내의 덕을 쌓는 데 노력하고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도왔다.


기해박해의 순교자

이재행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는 정해박해를 거쳐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5월 26일(음 4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하기 전까지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서 온갖 형벌을 받고 배교를 강요당하는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종일’이란 이름으로도 불린 이재행은 20세가 되어 천주교에 입교했다. 꼿꼿하고 관대하여 존경을 받았던 그는 성실히 교리를 실천했고 고향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어 산골로 들어갔다. 이후 이주생활을 하면서 가난과 싸워야 했지만 인내심과 박애정신으로 가족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이 주님에 뜻에 따라 순교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꿋꿋한 목소리로 신앙을 증거하며 결코 신앙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박사의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 박경화 바오로(정해박해 때 순교)의 신앙을 물려받은 열심한 신자였다. 아버지가 옥중에서 순교할 때까지 보여준 그의 효행은 모든 이들을 감복시켰다.

김사건은 부모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재산을 버리고 이곳 저곳으로 이주한 탓에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기도와 전교, 성경읽기에 많은 시간을 바치면서 교리를 실천하는데 열중했다. 또한 신자가정을 찾아 교회서적과 성물을 전해주거나 교리를 가르쳤고 죽을 고비에 있는 비신자에게 대세를 주었다. 을해박해 때 아버지 김창귀 타데오와 체포됐지만 배교한 김사건은 기해박해 때 ‘비록 죽을지라도 여한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며 순교했다.


정해박해의 순교자

박경화 바오로, 김세박 암브로시오, 안군심 리카르도는 정해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들로 박경화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의 아버지로 입교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난 을해박해 때 체포됐지만 배교로 풀려난 이후 더 신앙심이 깊어져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이주까지 했다.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교회서적을 열심히 읽고 비신자들을 전교하며 교리를 가르쳤고 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였던 인물로 체포되어 가는 중에 “우리가 오늘 가는 길에 대해 천주님께 감사를 드리자.”라는 말을 하여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노령과 무거운 형벌로 70세에 옥에서 순교했지만 평온한 표정으로 주님께 갔다.

1828년 옥사로 순교한 김세박은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가족을 떠나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교리를 가르치거나 교회서적을 필사하면서 살다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다. 가끔 산중에 들어가 신심에 힘썼고 어린이들을 즐겨 가르쳤고 식생활을 절제하고 밤중에 일어나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김세박은 박해가 일어나자 직접 관아로 찾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한 후 대구로 이송되어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세 분의 순교자를 만나 의지하며 신앙을 지켰다. 사형일을 선고 받고 철저하게 금식을 지켰지만 형벌로 쇠약해진 몸에 금식까지 하면서 더욱 쇠약해져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교했다.

젊은 시절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안군심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경상도로 이주한 후 생계를 위해 교회서적을 필사하면서 살았다. 겸손하고 친절한 안군심은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며 교리를 정성스럽게 가르쳤고 기도와 묵상을 하루도 빠지지 않는 가운데 일주일에 세 번 금식을 지켰다. 대구 감영으로 끌려온 안군심은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그럴 때마다 신앙심은 더욱 커졌고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서 생활하던 중 이질에 걸려 순교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번의 한국 방문 이후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게 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봉헌되는 124위 시복식을 앞두고 순교자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가운데 감사의 기도로 교구 지정 순례지인 관덕정 순교기념관, 복자성당, 경주 진목정 성지를 순례하며 전대사의 은총과 함께 하길 바란다.(참고문헌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

[월간빛, 2014년 6월호, 김선자(수산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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