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대구지역 순교자: 서석봉 안드레아의 순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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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6-16 ㅣ No.1289

[대구지역 순교자 20위의 삶을 묵상하며 - 대구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단순하고 우직한 믿음의 열매


서석봉 안드레아(?-1815)의 순교 이야기



똑똑하고 많이 배워야만 신앙도 깊어질 것이라 생각해 본적은 없는가? 교리지식은 깊지 않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미사에 나오고, 성당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늘 빠지지 않고 나와 묵묵히 일하는 분들을 보면 왜 마음이 짠해올까? 그것도 부부가 함께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서석봉 안드레아는 구성열 바르바라와 부부이며,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장인이다.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 언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훗날 교우들은 그를 ‘손골 박씨의 외조부’로 전해왔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경상도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의 부활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경주 관장은 안드레아에게 갖은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배교를 강요하였지만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의 우직한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던 경주 관장은 안드레아를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아내와 사위 그리고 다른 교우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된 안드레아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백절불굴의 항구심으로 참아내면서 신앙을 고수하였다. 당시 대구 감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조정에 올렸다.

“(그들은) 모두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십계 몇 구절 밖에 못 외우지만 깊이 미혹되어 뉘우칠 줄 모릅니다. 혹 엄한 형벌을 주기도 하고 혹 알아듣도록 타이르기도 했으나 끝까지 후회하지 않고 스스로 한 번 죽기로 결심하여 완고하기가 목석과 같았습니다. 그 죄상을 논하건대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대구 감영의 옥에 갇힌 교우들은 한결같이 서로를 격려하고 기도하면서 시련을 견뎠다. 감옥에 갇혀 문초를 당하는 동안 그들이 보여준 변함없는 평온함과 고요함 그리고 화목함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안드레아는 1815년 11월 사형을 언도 받은 후 아내보다 먼저 옥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서석봉 안드레아님! 저희도 혼돈스러울 때마다 오히려 단순하고 우직한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빌어주소서.

[2014년 6월 15일 삼위일체 대축일 대구주보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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