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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대구지역 순교자: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순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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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6-16 ㅣ No.1288

[대구지역 순교자 20위의 삶을 묵상하며 - 대구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곁에 있으면 마음이 든든한 분


최봉한 프란치스코(?-1815)의 순교 이야기



수없이 많은 인생의 강을 건너오다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나를 살려내기 위해 자신을 내던진 분을 만난 적이 있는가? 모르긴 해도 죽을 때 까지 그런 분은 잊을 수 없으리라. 가족이나 지인들 가운데 그런 분이 우리 곁에 있으면 왠지 마음이 든든할 것 같다. 순교자 최봉한 프란치스코를 생각하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관장 앞에서 문초를 당하게 되거든 모든 것을 나에게 뒤집어씌우시오.” 경상도 청송 노래산에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교우들을 걱정하며 한 말이다. 그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형언할 수 없는 혹독한 형벌로 여러 차례 정신을 잃었지만 끝까지 겸손하고 꿋꿋한 자세를 지키다 감옥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충청도 홍주 다락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였다.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해 살다 부친이 사망하였을 무렵 모친과 누이와 함께 상경하여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 성사를 받았다. 그의 가족은 정약종의 집에 살면서 황사영, 최필공 등과 가깝게 지내며 신앙의 깊이를 더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교회 지도자들을 잃게 되자 그는 천주교 서적들을 수습하였다. 그는 교회서적과 성물들을 가지고 경상도 깊은 산골로 들어가 그곳 교우들을 가르치며 지도자 역할을 하던 중 1815년 2월 부활대축일에 체포되었다. 그가 경주 관아로 교우들과 함께 끌려갔을 때, 그의 장모 구성열 바르바라가 모진 고문으로 마음이 몹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 것’을 권면하며, 하느님을 위해 함께 목숨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그가 얼마나 훌륭하게 그녀에게 힘을 주었던지 그녀의 모든 유혹은 사라졌고 갖은 고문 속에서도 굳건하게 견딜 수 있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와 함께 장인 장모도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그토록 바라던 순교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순교자 최봉한 프란치스코님! 저희도 당신처럼 가족과 이웃의 고통을 보면 솔선수범하여 자신을 버릴 줄 알게 하소서.

[2014년 6월 8일 성령 강림 대축일 대구주보 4면, 글 대구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그림 김효애 크리스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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