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최창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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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6-14 ㅣ No.1285

[124위 시복 특집] 최창현 요한(1759~1801년)


“이제 천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날에 천주를 배교하였던 것을 통절히 뉘우치면서 죽고자 할 따름입니다.”



서울의 한 역관 집에서 태어난 최창현 요한은 조선 교회 초창기에 권일신의 인도로 입교한 후 20여 년을 평신도 지도자로 헌신하다 순교한 인물입니다. 그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황사영은 「백서」에서, 최창현의 됨됨이가 매우 평화로웠고 몸가짐이 조심스러웠으며 일 처리에 공명하고 부지런하기가 한결같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최창현은 중인(中人) 신분이었음에도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의 일원으로 신부 역할을 하는 등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초기 교회의 지도적 신자들이 양반 신분의 학자 중심이었음을 감안할 때, 양반이 아닌 그가 교회 발전에 헌신하는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받은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이후 가성직 조직이 해체되고, 1791년 신해박해로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이탈하자 최창현은 평신도 지도자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 교회의 총회장 격으로 교회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주문모 신부 입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최창현은 무엇보다도 교리서의 한글 번역과 보급 등 문서 선교 활동으로 초기 교회 발전에 크나큰 공을 쌓았습니다. 당시 서민 대중은 어려운 한문 교리서를 읽고 이해할 능력이 없었기에, 최창현은 1636년 중국에서 발간된 예수회 디아즈 신부의 「성경직해」를 한글로 번역해 유포시켰습니다. 이후 한글판 「성경직해」는 조선 교회에서 거의 1세기 동안 애용되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미 주신부로부터 총회장으로 정식 임명되어 공공연하게 활동해온 최창현은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었고, 체포되어 곧바로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습니다. 의금부에서 처음 문초를 받을 때, 최창현은 한때 마음이 약해져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 다시 용기를 회복하여 전날의 약했던 마음을 진실히 뉘우치며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제 천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날에 천주를 배반하였던 것을 통절히 뉘우치면서 죽고자 할 따름입니다.”(「천주교신자재판기록」 중에서)

최창현은 끝으로 ‘자신이 천주교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6월 15일 삼위일체 대축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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