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심아기 바르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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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6-14 ㅣ No.1283

[124위 시복 특집] 인언민 마르티노(1737~1800년) · 심아기 바르바라(1783-1801년)


“그렇고 말고.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충청도 덕산 주래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 마르티노는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 천주교 신앙을 접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인언민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습니다. 1797년 정사박해 때 체포된 인언민은 돌에 맞아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가 부서지는 형벌 속에 순교하였습니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이렇게 되뇌었다고 합니다.

“그렇고 말고.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경기도 광주 태생인 심아기 바르바라는 오빠 심낙훈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특히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해 결혼을 단념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동정(童貞)을 바치기로 결심한 후, 심아기는 조용히 집 안에서만 지내면서 모범적으로 교회의 법규를 지켜 나갔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오빠 심낙훈이 체포되었습니다. 심아기는 머지않아 포졸들이 자신에게도 찾아올 거라며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둘이 함께 순교하자고 오빠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마침내 포졸들이 들이닥쳐 “집안에 있는 젊은 천주교인 여자를 잡으러 왔다.”며 위협하자, 심아기는 어머니에게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제가 천주의 성스러운 뜻에 순종하도록 놓아두십시오.”라고 말한 뒤,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분명하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후 한양으로 끌려간 심아기는 배교를 강요당하며 20일 동안 모진 형벌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계속되는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1801년 4월 초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반면에 그녀에 앞서 체포된 오빠 심낙훈은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굴복하여 무안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심아기가 순교한 뒤 심낙훈이 박해자들에게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제 누이 바르바라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쳐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죽게 하였는데, 누이는 끝까지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6월 1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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