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2014-0223.....연중7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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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4-02-23 ㅣ No.1471

연중 제7주일(가해)

레위기 19,1-2.17-18        1코린 3,16-23      마태 5,38-48

2014. 2. 23. 등촌3

주제 : 하느님을 닮기(=담기)

세상에 사는 우리는 삶의 목표를 누구처럼 닮거나 누구처럼 되기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그 누구는 세상에 나보다 먼저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이거나 살았다고 이야기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대상일 겁니다. 그런데 삶의 목표를 이렇게 표현하면 맘에 들까요? 나보다 먼저 살기 시작한 사람이나 그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벌써 또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거나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중일 텐데, 그 뒤만 따라가는 일로 만족할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은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새롭다는 말도 말을 하거나 듣는 사람에 따라서 그 뜻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어쨌든 새로워져야 합니다. 한자로 표현된, 일신(日新) 일신(日新) () 일신(日新)’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 표현을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알아듣느냐에 따라 내 삶이 나아가는 방향이나 그 목표가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늘 달라지고, 늘 새로운 자세로 대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의 본보기를 우리는 오늘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말씀에서 들었습니다. 그 내용의 주제는 사랑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이 사랑이라는 표현은 참 마음에 드는데, 예수님께서 해석하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은 받아들이거나 그대로 실행하기가 부담스럽다고 말하기가 쉬운 내용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않기, 오른뺨을 맞거든 다른 뺨도 돌려대기,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기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함께 가주는 일이 얼마나 가능하겠습니까? 요즘 세상에 통용되는 정의감에 넘치는 사람이라면, 그대로는 절대로 따를 수 없는 불의한 일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주시는 것이니까,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이 다 옳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열 걸음쯤 뒤로 물러선다고 해도 그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왜 어려운 일일까요?

 

모세를 통하여 선포되었던 십계명을 해석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말이 되지 않을 만큼 파격적인 일이라서 우리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실천하는 대상으로 바뀔 가능성이 없거나 아주 희박해서 그렇게 바뀌는 일이 힘들다고 하겠습니까? 분명히 어디엔가 대답은 있을 터인데, 그것을 알아내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첫 번째 독서로 들은, 구약성경 레위기의 말씀은 우리더러 하느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갑작스레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이셨던 것처럼 구원자의 삶을 지금 이 순간부터 내가 살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우리가 다가서기가 훨씬 편한 내용이 레위기말씀에 나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들을 수 있는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미워하는 것보다는 동족의 잘못을 꾸짖어서 그가 올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삶의 방법이고, 앙갚음을 하거나 앙심을 품는 일 대신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일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요즘 세상에서는 말씀그대로 나서기가 힘든 일입니다. 어른들의 말씀이 젊은이들에게 액면 그대로 전달되는 방법이 사라진 세상이고,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이의 잘못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지적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 된 세상 탓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시작은 이웃을 향하는 것보다 가장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소리가 됩니다. 자기 몸을 꾸미고 가꾸는 것은 그저 세상에 내 모습을 멋있게 드러내고 남들의 감탄을 바라는 의도가 아니라, 내 몸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당연히 귀중하고 아름답게 꾸며야한다는 말씀이지만, 세상에 사는 우리가 갖거나 드러낼 자세는 이것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삽니다. 그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 어느 누구도 똑같은 모양과 똑같은 행동으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의 모습이 저마다 다른 것만큼 우리가 드러내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연중7주일,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만큼,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어느 정도인지도 살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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