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교회사4: 일제의 사립학교법과 포교규칙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4 ㅣ No.376

한국 교회사 (4) 일제의 사립학교법과 포교규칙

 

 

일제는 서서히 교회에 그 마수의 손길을 뻗쳐온다. 복음 전파라는 거룩한 사명 하나로 학교 운영의 모든 어려움을 감수해 오던 가톨릭 학교에 종교 교육을 금지시키는 사립학교법과 선교 활동을 규제하는 “포교규칙”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교회는 실질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모순된 정교분리 원칙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종교 정책에서도 이른바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을 내세우고, 구체적으로 일본 당국에서 종교에 간여하지 않을 것이니 종교도 정치에 간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천명했었다. 물론 정교분리 원칙은 그 자체로서 조금도 나무랄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침략자이며 통치권력자인 일제의 주장이었고, 또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구상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과연 일제는 곧 그와 같은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1915년에 정교분리의 약속을 어기고, 종교교육과 포교를 규제하는 2개의 악법(惡法)을 제정,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종교 교육을 금지시킨 학교법

 

먼저 이해 3월 24일에 학교법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었는데, 그것은 사립 학교, 특히 종교계 학교에서 교육을 종교에서 완전히 분리시킴으로써 교육을 속화(俗化)시키려는 의도에서 제정된, 소위 사립학교규칙 중 개정령(私立學校規則中改正令)이었다.

 

이 법령은 물론 불교, 신도(神道), 개신교 등 모든 종교계 학교에 적용되는 것이었으나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가장 보게 된 것은 가톨릭 학교가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10년이 지나면 학교에서 종교교육이 금지되고, 또 5년이 지나면 모든 교사들이 정부에서 인정하는 교사자격증을 갖추도록 한 규정은 가톨릭 학교를 가장 난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가톨릭 학교들은 주로 외인 학생들(그들의 수는 평균 43%)에게 복음을 전파할 목적에서 세워졌던 것이 사실이고, 또 바로 그러한 거룩한 목표는 그간 학교 운영에 따른 막대한 비용과 희생을 감수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목적이 사라지게 되면 그간의 온갖 희생이 너무나 억울하였고, 따라서 모두들 용기를 잃고 실의에 빠질 것이 분명하였다.

 

종교교육의 금지 규제는 비단 정식 교과목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교실 밖에서, 아니 학교 구내에서는 일체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또 기존 학교의 경우는 앞으로 10년간은 종교교육이 허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는 즉각적인 중단을 요구하는 사례가 생겼다. 또 공립학교에서는 비록 학교 밖이요 사석이라 할지라도 학생들에게 전교하는 것이 절대로 금지되었다.

 

실제로 충남 당진 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던 조원환(曹元煥)이란 교우 선생은 천주교에 관심을 나타내는 학생들에게 몇 차례 사석에서 교리를 가르친 적이 했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교장은 그 학생들을 퇴학으로 위협하였고, 군수는 그 교우 선생을 호출하여 전교를 즉시 중단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전근이나 면직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그러한 지시에 응할 수 없다고 대답하고는 학교에 나가지를 않았다. 분한 나머지 그는 곧 그와 같은 사실을 뮈뗄 주교에게 알리고(1915. 2. 19. 서한) 그 대책을 요청하였다. 이에 뮈뗄 주교는 즉시 총독부의 교육국장을 방문하고, 조원환 선생이 사석에서 전교한 일은 있으나 학교에서 전교한 일은 절대로 없다고 말하며, 사건의 진상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조원환 선생의 면직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음 사립학교 교사도 공립학교 교사와 마찬가지로 교사자격증을 소유해야 한다는 규정 또한 5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지기는 했으나, 교회에서 이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는 막막할 뿐이었다. 언젠가는 정부에서 교사자격증을 요구할 때가 오리라는 것을 교회에서 일찍이 예측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뮈뗄 주교는 이미 1908년에 서울에 사범학교를 세워, 신자 교사를 양성할 계획을 세우고, 유럽의 20여 개의 수도회를 찾아가 간절히 호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것이었고, 다행히도 마지막으로 독일 오틸리엔의 베네딕도회에서 쾌히 수락함으로써, 그들의 도움에 힘입어 1911년에 서울에 사범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일제가 교사 양성을 독점하기 시작한 때여서 그 학교는 2년 만에 문을 닫고야 말았다. 물론 그 학교가 성공했더라면 한국 교회는 독자적으로 가톨릭 교사를 양성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교사자격증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한국인 수녀들이 성공적으로 운영하던 여학교들이었다. 당시 여학교는 서울에 2개, 제물포에 1개, 지방에 4개, 모두 7개교였다. 그런데 전쟁으로 선교사들이 동원되어 나감으로써 이미 3개 학교가 문을 닫은 상태에서, 또 이 법령으로 인해 나머지 학교들도 폐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교회 당국에서는 수녀들을 정부 학교에 보내 교사자격증을 취득하게 할 생각도 해보았으나 수녀들을 일반 학교에 보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그 계획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일제가 사립학교법을 제정한 근거는 물론 첫째로 근대사조의 영향을 받아 교육의 중립을 청소년 교육의 불가결의 조건으로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종교계 학교들도 겨냥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뮈뗄 주교는 개신교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가톨릭 학교는 아닐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그 법을 제정한 근본적인 이유는 일제의 일본화(日本化) 정책에 있다고 단언하였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제는 교육을 독점, 국유화(國有化)하려는 것이고, 또한 보통학교에서부터 일본어의 교육을 강요하고 있는 것도 실은 모두 일본화 정책의 조속한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라고 하였다. 어쨌든 한국 교회는 이번 새 학교법으로 인해 속수무책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선교 활동을 규제한 “포교규칙”

 

사립학교법에 이어 같은 해 8월 16일에 공포된 소위 “포교규칙”(布敎規則)은 전자에 비해 더 악질적이었다. 왜냐하면 복음의 전파를 규제함으로써 종교의 고유 영역을 노골적으로 침범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이 “포교규칙”은 선교 활동을 여러 면에서 다음과 같이 까다롭게 규제하고 있다.

 

1. 포교에 종사하려는 자(布敎者 또는 布敎擔任者)는 총독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여기에는 신부만이 아니라 회장도 포함된다. 그리고 포교자는 연말에 신자 명단을 총독부에 제출해야 하고 또 포교자가 바뀔 때는 포교자의 이전과 변경 신고도 해야 한다.

 

2. 포교소(布敎所), 즉 본당(성당)이나 공소(강당)를 신설할 때는 총독의 허가를 얻어야 하고, 동시에 포교소의 명칭과 소재지, 평수와 도면, 설립의 이유, 설립기금의 조달 방법, 관리와 유지 방법 등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금품을 거두려면 사전에 소관 경찰서의 허락을 얻어야 하고, 또 포교소를 이전하거나 폐지할 때도 신고를 해야 하며, 포교관리자는 각 포교소의 신도수와 전년에 비해 증감한 수를 해마다 연말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

 

3. 이미 설치된 포교소나 담당 포교자는 신설 때에 요구되는 동일한 사항들을 본령(本令)의 시행일(10월 1일)부터 3개월 이내(그해 12 월 31일까지)에 신고해야 한다.

 

4. 포교의 방법, 포교관리자의 권한, 포교자 감독의 방법, 또는 포교관리자를 부적당하다고 인정할 때 총독은 그 변경을 명할 수 있다.

 

이 법령은 8월 19일 관보(官報)에 공고되는 동시에 신문에도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과 대구 교구장은 휘하 신부들에게 회람을 보내고, 필요한 서류들을 가능한 한 빨리, 또 정확하게 작성해 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물론 교회 당국은 이 새 규칙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너무나 무리하고 까다로운 요구가 많았다.

 

첫째 포교관리자, 즉 주교를 파면할 재량권을 총독에게 인정한, 교회법을 무시한 언어도단의 처사는 차치하더라도 주교를 그 교구의 관리자로까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주교가 두 명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한국 교회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그러므로 신고는 본당신부와 당국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총독부의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급선무는 뮈뗄 주교와 드망즈 주교를 각기 서울교구와 대구교구의 관리자로 인정받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많은 서류를 작성하고 또 많은 교섭을 해야 하였다. 마침내 10월 20일에 관리자의 인가가 나오기는 했으나 관보에는 11월 13일에야 공고됨으로써 그때까지 기다려 필요한 일건서류들을 인쇄하여 신부들에게 발송하게 되었다.

 

그 다음은 포교소, 즉 본당이나 공소와 관련된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었는데 도면(圖面)까지 첨가하게 되어 있어서 할 일이 너무 많고 또 까다로웠다. 어쨌든 성탄 전까지는 본당으로부터 대부분의 서류들이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하지 않는 것도 적지 않았고, 또 고쳐야 할 서류도 많았다. 12월 31일이 서류 접수의 마감날이었으므로 일단 일건서류를 갖추어 갖고 제출하였다. 그러나 군청과 도청, 그리고 총독부를 위해 모두 세 통이 필요하다고 하며 두 통의 서류를 더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준비된 한 통만을 접수시키고 나머지 두 통을 가능한 한 속히 만들어 제출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교구 본부에서는 또 3백 64건의 서류와 6백 4개의 도면을 새로 작성해야 하였고, 이를 위해 제도가와 비서를 총동원하여 밤낮으로 일을 시킨 끝에 1월 8일에 간신히 그 일을 끝냈다.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또 새로운 요구를 해왔다. “포교규칙” 9조에 의하면 포교소에는 포교자가 있어야 하고, 그 포교자는 10일 이내에 신고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포교자들도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존 포교자들이란 다름아닌 바로 본당신부들이라고 설명하였으나 통하지가 않았고, 그래서 또 다시 기존 본당신부들의 신고를 위해 필요한 서류 3부를 작성해야 하였고, 그 일이 1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본당과 공소 그리고 본당신부에 관한 신고를 위해 준비하고 작성해야 했던 일건서류는 무려 1천 3백 32건에 달하였다. 그렇게 많은 서류들을 불과 3개월 동안에 작성해 내야 하였다. 그런데 마침 전쟁 중이라 3분의 1 이상의 선교사들이 동원되어 전쟁터에 나가 있었고, 그들을 대신하여 임시로 본당을 맡아오고 있던 신부들은 본당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고, 또 그들마저도 가을 판공으로 오랫 동안 본당을 비우고 있었다. 그래서 일은 더욱 어렵게 되어 갔다.

 

“포교규칙”은 선교 활동을 크게 규제함으로써 복음 전파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였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본당의 신설이 아주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포교규칙”은 신설에 따른 시설비, 유지비 등의 제반 조건을 정확히 제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당의 신설이란 오늘날도 거의 마찬가지이지만 단번에 성사되는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어서 그 법령이 요구하는 조건을 처음부터 제시할 수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허가를 얻어내기도 어려웠다. 또한 포교소가 없는 공소, 말하자면 사가(私家)에서 성사가 집전되던 공소는 앞으로 그 방문이 어렵게 되었다.

 

무릇 법은 그것을 제정한 정신이 중요하지만 그 시행 과정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런데 “포교규칙”은 그 제정의 정신과 함께 그 시행 과정도 나빴다. 다시 말해서 당국은 지방경찰을 통해 시행 여부를 끊임없이 감사하게 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이 포교규칙에 대해 3 · 1운동 직후 이런 뜻깊은 말을 하였다. 이제 일본 당국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그 정책을 전환시키려 하고 있다. 차제에 포교규칙도 철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리와 양립될 수 없는 그 법이 더 이상 존속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1988년 4월호,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 신부)]



1,00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