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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60: 14세기 (1)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요한네스 타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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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28 ㅣ No.1102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60) 14세기 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요한네스 타울러


‘나’를 버리고 ‘내 안에 주님’을 만나다

 

 

13세기 완덕을 향한 영성생활을 갈망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여성 신비체험가들이 나타났으며 신학자들에 의해 사변적인 영성신학과 신비신학이 제시되자, 14세기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는 신비체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특히 여성 수도자들의 영적 지도를 담당하던 수도자들과 신학자들은 그 당시 속출하는 신비체험의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 가능하도록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신비체험을 다룬 에크하르트

 

독일 호크하임(Hochheim) 출신이었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는 청소년기에 에르푸르트(Erfurt) 도미니코회에 입회했습니다. 에크하르트는 1277년부터 파리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시작했으며, 이후 쾰른(Kln)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1293년부터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1294년부터 에크하르트는 독일에서 수도원장, 관구장, 총장 대리 등의 직책을 맡아가며 수도회를 위해 일했습니다. 1311년 에크하르트는 ‘마이스터’라는 칭호를 얻고 파리 대학에서 다시 신학을 가르쳤으나, 1313년부터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1323년경 쾰른으로 돌아갔습니다. 1326년 프란치스코회 출신 쾰른 대주교 비르네부르크의 하인리히(Heinrich von Virneburg, 1244/46~1332)는 에크하르트의 저서와 가르침에 이단적인 요소가 있다고 교황청에 제소했으며, 1327년 에크하르트는 교황청의 소환으로 아비뇽(Avignon)을 다녀오던 길에 사망했습니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삼부작(Opus Tripartitum)」에서 설명하는 형이상학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에크하르트는 제1부 「명제집(Opus Propositionum)」에서 ‘있음(存在, esse)’과 ‘있는 것(存在者, ens)’을, 즉 ‘있음 자체’와 ‘이것저것으로 있음’을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있음은 신이다(Esse est Deus)’라고 언급했습니다. 결국 ‘있는 것’은 오직 신으로부터 ‘있음’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에크하르트는 라틴어로 저술한 「삼부작」을 독일어로 다시 설명했다고 추정되는 저서 「신적 위로의 책(Das Buch der Gttlichen Trstung)」에서 ‘좋음’과 ‘좋은 사람’의 개념을 빌려 그의 형이상학을 신학적인 관점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는 ‘좋음’은 창조되지 않았고, 자기를 쏟아 부어 ‘좋은 사람’을 낳는다고 언급했습니다. 즉, ‘신’은 ‘낳는 것’이며, ‘좋은 사람’은 신적 본질을 자기 안에 받아들인 ‘낳아진 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에크하르트는 ‘좋음’과 ‘좋은 사람’과의 관계를 창조주 ‘성부 하느님’과 육화한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유추했습니다. 따라서 에크하르트는 인간이 자신의 형상에서 벗어나서 신의 형상으로 변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에크하르트의 초기 저서 「강화(Reden der Unterweisung)」에서 모든 덕행을 넘어서는 순명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떠나야 함을 의미한다는 가르침과 일맥상통 합니다.

 

에크하르트는 저서 「설교집(Predigten)」에서 ‘버리고 떠나 있기(Abgeschiedenheit)’를 강조하면서 본격적으로 신비신학을 전개했습니다. 즉, 인간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알지 않고 가지지 않을 때에 자기 자신마저 넘어서는 진정한 가난에 도달하며, 이 가난 속에서 영원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에크하르트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유출(流出)’되었다는 사실보다 신을 향해 ‘돌파(突破)’할 때에 신과 일치할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자기 자신에게마저 매어 있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된 인간이어야 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즉, 인간 영혼 속에 신이 탄생함으로써 인간은 신과 일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크하르트는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500경)를 통해 플라톤 사상을 접하면서 ‘본질-신비 신학’을 전개하면서도 ‘부정신학적 신비신학’의 분위기를 담았습니다. 또한 그는 당대에 여성 신비체험가에 의해 널리 확산되었던 ‘신부-신비신학’도 함께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만의 독특한 논리 전개가 동시대 신학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변적인 신비신학을 낳았습니다. 게다가 그의 신비신학이 범신론(汎神論)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면서 에크하르트는 많은 비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교황청에 제소까지 당했습니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자신을 제대로 변호해보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실천적인 관점을 보완해 신비체험을 다룬 타울러

 

독일 국경과 맞닿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출신이었던 요한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는 18세쯤 고향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입회했으며, 마침 그곳에서 활동하던 에크하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타울러는 쾰른 도미니코회 대학에서 수학하고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와 1330년부터 도미니코회 수녀들과 베긴회 회원들을 위해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1339년경 타울러는 교회와 세속 권력과의 갈등 때문에 스위스 바젤(Basel)로 유배를 갔는데, 그곳에서 신심 깊은 성직자와 평신도들로 구성된 ‘하느님의 벗들회(Friends of God)’라는 영성 운동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1343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던 타울러는 1346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지진과 화재가 발생하고 이듬해 흑사병이 창궐하자 여러 지역을 여행했으며, 1350년대 플랑드르를 방문해 얀 반 뤼즈브룩(Jan van Ruusbroec, 1293/94~1381)을 만났습니다.

 

타울러 역시 독일 라인 강 유역에 확산되었던 신비체험의 계보를 따르면서 하느님과 일치를 설교했습니다. 타울러는 인간 영혼의 근저에 자리 잡은 신적 심연으로 들어가야 신비체험에 참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신적 심연에 도달한 영혼은 신의 불꽃을 받으며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신적 암흑과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서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타울러도 인간 영혼 안에 성자의 탄생을 언급했는데, 자신의 영혼 안에 신이 탄생하길 원한다면 마리아를 본받으라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타울러는 신과 일치하고 싶은 영혼은 순결한 처녀로서 신을 향한 약혼의 상태에서 외적인 감각을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 안식처를 마련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에크하르트는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신비체험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신비신학은 범신론적이고 정적(靜寂)주의적이라고 비판받았습니다. 에크하르트의 영향을 받은 타울러는 보다 덜 형이상학적이면서 더 실천적인 관점에서 윤리적이고 심리적인 신비체험을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가르침도 가끔 정적주의로 오해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신비신학이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본질-신비 신학’을 추구하면서 모호한 부분을 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상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28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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