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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회원들의 영성: 칼 라너 (1) 현대 신학에 큰 영향 끼친 예수회 대표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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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13 ㅣ No.1094

[예수회 회원들의 영성] 칼 라너 (1) 현대 신학에 큰 영향 끼친 예수회 대표 사제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20세기 신학자이자 영성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가 출간한 책만 4000여 권이 되고, 그의 신학을 다룬 단행본과 정기 간행물만 해도 700종이 넘는다. 그는 아직 복자나 성인품에 오르진 않았지만, 현대 보편 교회의 신학과 교회 구조, 삶의 자리를 바꾼 예수회 소속의 대표적 사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현대 교회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칼 라너를 소개한다.

 

 

1. 가정 배경

 

칼 라너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평범한 중산층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칼 요제프 에리히 라너(Karl Josef Erich Raher, 1868~1934)와 어머니 루이제 라너(Luise Rahner, 1875~1976)는 1896년 10월 20일 결혼하여 일곱 남매를 두었다. 일곱 남매 중 그의 바로 위 형이 후고 라너(Hugo Rahner, 1900~1968)다. 그는 칼 라너보다 먼저 예수회에 입회하여 나중에 인스부르크 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와 교부학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사범학교 교사로 독일어, 프랑스어, 역사를 전공하였다. 그는 자신을 통해 자녀들에게 교육과 인문과학의 가치를 알려주었으며 자녀 모두가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였다. 두 아들 칼 라너와 후고 라너는 아버지가 환갑을 맞이하였을 때 자신들이 집필한 375쪽에 달하는 책을 그에게 헌정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독일의 전형적인 가톨릭 어머니상을 지닌 분이었다. 그녀는 자녀들의 교육할 때 학문보다는 인성과 신앙적인 면을 먼저 가르쳤다. 특히 칼과 후고의 학문적 성공에 기뻐하기보다는 그들이 교만해질까 봐 염려하였다. 어머니 루이제는 자녀들이 주일 미사를 거르지 않도록 하였으며 단정한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 또, 만족하고 사는 법을 가르쳤고 나아가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곱 남매를 키우고 교육하는 것은 당시의 교사 월급으로는 부족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머니는 하숙을 쳐서 살림에 보탰다. 어머니가 75세 생일을 맞이하자 아버지의 60세 생일 때와 마찬가지로 칼과 후고는 자신들의 강론과 강연 원고를 엮어서 책으로 헌정하였다. 

 

어머니 루이제는 신심이 깊었을 뿐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감각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첫 아들 게오르그가 전쟁 직후 수용소에 갇히게 되자 루이제는 직접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석방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겉으로 드러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아들 후고가 뇌종양으로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슬퍼하기보다는 아들에게 용기를 주면서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2. 학교 생활

 

1910년 칼은 학교 공부를 시작하였다. 첫 3년 동안 그는 공부에 두각을 내지 못하였다. 그는 그저 남들과 같이 평범한 아이였으며 성적 또한 중간에 머무르고 있었다. 독일 학제로 8학년에 이르면서부터 그는 최고의 성적을 내기 시작하였다. 성격은 꼬치꼬치 캐묻고 사변하는 유형이었으며 잘 투덜거렸다. 남들과 마찬가지로 장난기가 있어서 수업을 받지 않으려고 교실에 악취탄을 뿌리기도 하였다. 교사에게 거짓말도 하여 체벌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종교 교사인 마인라드 포겔바허(Meinrad Vogelbacher, 1879~1965)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마인라드는 라너의 집안과도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그는 로마의 게르마니쿰(Collegium Germanicum et Hungaricum)에서 공부를 하여 예수회원들과도 친분을 유지하였다. 비록 무뚝뚝한 성격이었지만 지적이었으며 교양이 있었다. 학교에서 그는 여러 종교에 대하여 가르쳤으며 편견이 없이 개방적인 자세를 가졌다. 그의 이러한 방식이 라너에게 철학적 신학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라너는 「준주성범(Imitatio Christi)」을 영적 독서로 읽곤 하였다. 당시의 16~17세 청소년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학교 운동보다는 산책을 좋아하였다. 누나 안나(Anna)의 소개로 청년 운동조직인 크빅보른(Quickborn)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주말에는 산장에 머무르곤 하였는데 이 모임에서 당시의 유명한 가톨릭 사제인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1885~1968)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베로나(Verona) 출신이지만 부모님의 독일 이주로 말미암아 독일에서 성장하였고 마인츠(Mainz)교구의 사제로 활동 중이었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청년 운동을 통해 전례와 교회의 쇄신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는 베를린에서 문학과 철학 작품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강의하였는데 당대 인기 과목이었다. 칼 라너도 베를린에서 그의 강의를 수강하였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1948년 뮌헨대학으로부터 ‘그리스도교적 세계관 학과’(Lehrstuhl fr Christliche Weltanschauung) 교수로 초빙된다. 이 학과는 그를 위하여 새롭게 만든 학과이기도 하다. 칼 라너는 1964년 과르디니의 교수직을 이어받는다. 

 

1922년 칼 라너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게 된다. 그의 최종 성적은 ‘매우 우수’였다. 그가 장래 희망 학업으로 ‘신학’을 지목하였다는 것이 눈에 띈다. 누군가가 그에게 왜 예수회원이 되었냐고 질문하였을 때 그는 매우 실망스러운 대답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번개가 번쩍이는 듯한 깨달음이나 갑작스럽고 신비로운 성소 경험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에게는 그러한 극적인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부부의 예를 들었다. 대부분의 부부는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면 왜 결혼했는지에 대한 세세한 이유를 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회원이 된 이유는 그의 가정적 배경과 성격적 특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가정은 뿌리 깊은 가톨릭 집안이었다. 따라서 조용한 가운데 긴 시간 동안 서서히 그의 성소가 자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14일, 이규성 신부(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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