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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에드먼드 캠피언 (하) 마지막 순간에도 죽음 선고한 여왕 위해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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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07 ㅣ No.1088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에드먼드 캠피언 (하) 마지막 순간에도 죽음 선고한 여왕 위해 기도

 

 

- 고문대 위의 성 에드먼드 캠피언과 동료 순교자. 출처=가톨릭 굿뉴스.

 

 

캠피언은 가톨릭 신앙을 더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열 가지 이유(Ten Reasons)」라는 책자를 펴냈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① 모든 이단은 입맛에 따라 성경 말씀을 자의적으로 뽑아서 사용한다. ② 어떤 경우에는 성경의 분명한 내용마저 왜곡해버린다. ③ 프로테스탄트들은 보이는 교회를 거부함으로써 어떠한 교회의 존재도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④ 프로테스탄트들은 처음 네 차례의 공의회를 존중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다. ⑤ㆍ⑥ 프로테스탄트들은 교부들을 무시해버린다. ⑦ 교회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⑧ 츠빙글리와 루터, 칼뱅의 글들은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로 가득 차 있다. ⑨ 프로테스탄트들은 논쟁할 때 의미 없는 속임수들을 많이 쓴다. ⑩ 다양하면서도 많은 수의 가톨릭 증거자들은 그 자체로 매우 인상적이다.

 

캠피언은 노퍽(Norfolk)으로 가는 도중에 지인이 사는 라이포드(Lyford)에도 꼭 들르고 싶어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면서 눈에 띄지 않으려 조심하였지만, 엘리엇과 젠킨스라는 사람들의 밀고로 1581년 7월 17일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그가 잉글랜드에 들어온 지 불과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체포된 그는 ‘선동적인 예수회원 캠피언’이라는 문구가 붙여진 모자를 쓴 채 런던 시내 곳곳으로 끌려다닌 후 런던탑에 갇혔다. 그는 레스터 하우스(Leicester House)로 잠시 끌려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앞에서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심문을 지켜보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캠피언이 자신을 여왕으로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를 직접 묻기도 하였다. 

 

캠피언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 역시 여왕의 통치권 아래 순명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답변하였다. 여왕은 그렇다면 왜 교황이 자신을 파문한 것이냐고 재차 물었고, 캠피언은 이 문제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의견이 엇갈려 있다고 답하였다. 

 

사실 심문자들 역시 한때 자신들의 동료였으며 뛰어난 인재인 캠피언을 잃고 싶지 않았고, 될 수 있는 대로 그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곁으로 와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신앙에 대해서 별다른 열정이 없던 그들이 캠피언의 신앙심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캠피언의 확고한 태도를 재확인하면서, 그들은 이 문제를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의 문제로 국한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다루고자 했고, 그에 대한 심문은 그를 반역죄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심문해도 별다른 소득이 없자, 캠피언을 사형시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당시 잉글랜드 법에 따르면, 사제 직분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캠피언을 사형에 처한다면 나라 안팎에서 적지 않은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지면서 그에 대한 오랜 심문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캠피언의 마지막 변론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이유가 궁색하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무죄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톨릭을 믿는 것이 반역을 행하는 것이라면, 어떤 비난도 감수하겠습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누구 못지않게 여왕님께 충성스런 백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당신들의 모든 조상님, 곧 돌아가신 모든 사제와 주교들뿐만 아니라 선왕들을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들은 한때 잉글랜드의 영광이었지만 교황의 자녀이기도 했습니다. 당신들이 반역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매도해버린 우리의 가르침이 그분들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타락한 후손들이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오히려 이를 기쁨이자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은 이후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약 11일 동안 캠피언에겐 족쇄가 채워졌다. 여동생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러 오기도 하였고, 그를 고발했던 조지 엘리엇도 찾아왔다. 캠피언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고발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엘리엇에게 “참회와 더불어 고해성사를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캠피언은 마지막 며칠 동안 온전히 죽음을 준비하였다. 감옥에서도 고행하고 단식하였으며, 이틀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였다.

 

1581년 12월 1일 사형 집행이 예정된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고, 캠피언은 그들을 향해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주시고 좋은 가톨릭 신자로 만들어주시길 빕니다”라고 말하였다. 말 두 마리가 준비되었다. 한 말에는 캠피언이 다른 말에는 랄프 셔윈과 동료 예수회원 알렉산더 브라이언트가 묶인 채로 진흙과 빗속을 헤치며 천천히 끌려갔다. 교수대에 도착하자 캠피언은 그 밑에 세워진 수레에 올라섰고 진흙과 먼지로 범벅이 된 그의 목에 밧줄이 걸렸다. 그는 교수대 위에서 큰 소리로 배심원들을 용서하였고, 심문 중에 혹시 자신이 누설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였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나왔다고 하는 책을 절대 소유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죽기 전에 여왕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관리들의 요구에, 자신은 여왕을 모욕한 적이 없기에 결백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여왕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 사형 집행이 시작되었다. 그가 올라서 있던 수레가 치워지면서 목에 걸린 밧줄이 그의 목을 강하게 조였다. 그는 의식을 잃을 때까지 교수대에 매달려 있었고, 사형집행인은 그의 사지를 절단한 뒤 당시의 관례대로 처리하였다.

 

가톨릭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에드먼드 캠피언은 1886년 12월 9일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동료 순교자 39명과 함께 시성되었다. 그의 축일은 12월 1일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7일, 김학준 신부(예수회,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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