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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에드먼드 캠피언 (상) 여왕의 남편감, 신앙 위해 떠돌이 사제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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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01 ㅣ No.1085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에드먼드 캠피언 (상) 여왕의 남편감, 신앙 위해 떠돌이 사제 되다

 

 

성 에드먼드 캠피언.

 

 

16세기의 잉글랜드는 모호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153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는 자신의 재혼에 반대하는 교황청에 분노하여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한 뒤 독립시켰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도 선왕의 정책을 계승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로 에드워드 6세가 요절하면서 상황은 다시 급변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인 메리 1세가 여왕으로 추대되면서 잉글랜드는 다시 로마 가톨릭의 나라가 됐고, 잉글랜드의 새로운 교회(영국 국교회 혹은 잉글랜드 성공회)는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메리 여왕이 약 5년간 재위하다가 1558년 세상을 떠난 후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으로 선포했고, 잉글랜드 백성들은 다시 영국 국교회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처럼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라는 두 개의 종교가 양립하면서 때로는 한 쪽이 다른 한쪽을 박해하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이 당시 잉글랜드의 모습이었다. 

 

에드먼드 캠피언은 이렇게 급변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1540년 1월 24일 잉글랜드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캠피언은 17세에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주니어 펠로우(Junior fellow)로 선발되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는 1560년 20세에 학사 학위를 취득함과 동시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대한 수위권 선서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그는 1566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옥스퍼드 대학 공식 방문 환영 인사로 선정되었고, 여왕 앞에서 토론을 진행하는 사회자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이때 몇몇 인사들을 통해 캠피언이 여왕의 미래 남편감이라는 얘기가 세간에 나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래가 촉망되던 캠피언은 영국 국교회의 부제가 되면서 신앙의 정통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고민을 숨기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가 교황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다. 주변에서는 그에게 성공회 신앙을 재확인하는 선언을 하도록 압박을 가했지만,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이 자신의 직무일 뿐 누구도 자신에게 신앙을 강요할 수는 없다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직책에서 물러난 뒤 아일랜드로 건너가 지냈다. 

 

그러던 중 1570년 비오 5세(재위 1566~1572) 교황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파문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화가 난 여왕은 가톨릭 주교들을 자리에서 내쫓고 프로테스탄트 기도서를 출간하였으며 백성들의 성사생활을 금지시켰다. 1572년 캠피언이 아일랜드에서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잉글랜드까지 퍼졌다. 결국, 아일랜드 더블린에서는 의심스러운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수색이 시작되었고, 캠피언은 몸을 피하며 여기저기로 숨어다녀야 하였다. 결국 그는 프랑스 북부 두에(Douai)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였고, 1573년 무사히 학위를 받았다. 

 

그후 ‘만약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예수회에 입회하고 싶다’는 뜻을 품고 로마로 갔다. 그 해에 캠피언은 오스트리아 관구 소속으로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주로 프라하에 머물렀다. 그는 1574년 9월부터 프라하에 있는 학교의 수사학 교수로 임명되어 가르쳤다. 자신의 양성 과정도 5년 만에 마치게 되면서 1578년 9월 8일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그는 1580년 로마에서 부를 때까지 줄곧 교육에 헌신하였다. 로마에서는 에드먼드 캠피언 신부와 로버트 파슨스 신부, 랄프 에머슨 수사를 잉글랜드로 파견하기로 하였고, 이들은 1580년 6월 16일 잉글랜드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 예수회원들이 우선적으로 했던 일은 자신들이 잉글랜드에 온 이유가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을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만약 체포될 경우 제대로 된 심문의 기회를 통해 자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를 밝혀보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캠피언은 그 유명한 「캠피언의 선언(Campion’s brag)」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예수회 사제이며, 잉글랜드의 통치권 아래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행하기 위해서 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은 사본으로 만들어져 빠르게 다른 도시로 퍼져나갔다. 원래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것이지만, 캠피언이 수행하고 있는 사명의 정당성을 밝혀주는 글로 알려지게 되면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속한 신생 수도회인 예수회는 성 도미니코회나 성 베네딕도회와는 달리, 영국의 개신교도들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수도회였다. 자연스레 여기저기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예수회 창립자가 스페인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회원들은 스페인과 특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영국의 여왕을 살해하려는 집단이고, 영국이 혼란 상태에 빠지면 스페인 펠리페 2세 국왕이 영국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식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캠피언과 파슨스는 이러한 소문에 개의치 않고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였다. 보통 밤에 고해성사와 면담을 했고, 새벽 무렵이 되면 미사를 봉헌하는 식이었다. 될 수 있으면 한 집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머물렀는데 만약 추적의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다른 장소로 이동하였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특히 영국이 아닌 대륙에서 공부하였다는 점과 로마로부터 파견을 받았다는 점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굉장한 존경심을 갖고 예수회원들을 대하였다. 

 

물론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이리저리 이동하며 다녀야 하는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캠피언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내가 이단자들의 손에서 그리 오래 벗어나 있지는 못할 것이다. 적들은 너무나 많은 눈과 입, 감시자와 술책을 갖고 있다. 나는 내가 보기에도 매우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다니고, 이름도 자주 바꾼다. 가끔은 내가 이미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글들도 읽게 된다. … 그리고 협박성 포고문은 매일 올라오고 있다. … 나의 안전을 위해, 신자들이 자신들의 안전마저 포기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1일, 김학준 신부(예수회,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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