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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56: 13세기 (4) 카르멜 수도회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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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01 ㅣ No.1084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56) 13세기 ④ 카르멜 수도회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쇄신과 통합으로 영적 활력 불어넣은 수도 공동체들

 

 

디르크 보우츠 작 ‘광야의 예언자 엘리야’.

 

 

13세기 중반에 또 다른 수도회들이 출현했습니다. 이 수도회들은 그 당시 처음 시작하는 수도회가 아니었고, 다른 형태로 이미 수도생활을 하던 공동체였는데, 교회 당국이 그들에게 탁발 수도회의 형식을 갖출 것을 요구했습니다.

 


카르멜 산에서 시작된 카르멜회

 

카르멜회(Carmelitae)라고도 하는 ‘카르멜산의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형제회(Ordo Fratrum Beatissimæ Virginis Mariæ de Monte Carmelo)’는 팔레스티나 동북부 카르멜산에서 시작된 수도 공동체였습니다. 카르멜회의 1281년 회헌에 따르며, 카르멜회 설립자는 엘리야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명을 받은 엘리야 예언자는 요르단강 동쪽에 머물렀으며, 카르멜산에서 바알의 예언자 및 아세라의 예언자와 대결을 펼쳤습니다.(1열왕 17-19장 참조) 따라서 엘리야 예언자는 평소에 카르멜산 부근에 은수처를 마련하고 관상생활을 실천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알베르투스(Albertus Hierosolymitanus, 재임 1204~1214)는 13세기 초에 카르멜산 엘리야의 우물 주변에서 은수생활을 실천하던 공동체에 ‘생활 규칙(Formula Vitae)’을 작성해주었습니다. 아마도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년) 이후에 서방에서 온 수도자들이나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 내에 카르멜산에 남아서 은수생활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알베르투스 규칙서’는 베르톨두스(Bertoldus Calabriensis, ?~1195)나 브로카르(Brocard, ?~1231)에게 전해졌다고 하는데 전자는 연도가 맞지 않고, 후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평가되었습니다. 하지만 1226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PP. III, 재임 1216~1227)는 이 규칙서를 인준했으며, 124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PP. IV, 재임 1243~1254)는 이 규칙서에 관상생활뿐 아니라 사목 활동을 담아서 개정해 인준했습니다.

 

13세기 중반에 예루살렘 왕국이 쇠퇴하자 카르멜회는 팔레스티나를 떠났으며, 후반에 이미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는 수도회 인준 문제를 논의하면서, 카르멜회 회칙에 담긴 탁발 수도회 성격을 근거로 카르멜회를 탁발 수도회로 잠정적으로 인준했습니다. 또 1281년 런던에서 개최된 카르멜회 총회에서 카르멜회는 수도회 설립 기원을 엘리야 예언자에게서 찾았으며, 탁발 수도회의 형식인 사목 활동을 위해 교육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1298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ius PP. VIII, 재임 1294~1303)는 카르멜회를 완전한 형태를 갖춘 탁발 수도회로 인정하고 인준했습니다.

 

 

관상생활과 사목 활동을 병행한 카르멜회

 

카르멜회의 영성은 엘리야 예언자를 영적인 스승으로 모시고 관상생활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카르멜회는 엘리야 예언자를 본받아 관상생활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수도자들은 한적한 곳에서 고독과 침묵 속에 은수생활을 실천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카르멜회는 마리아 신심을 열정적으로 실천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마리아에게 봉사하는 특별한 임무를 지녔다고 생각하면서 마리아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노력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카르멜회 총장이었던 시몬 스톡(Simon Stock, 1165~1265)은 1251년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했는데, 마리아는 그에게 갈색 스카풀라를 건네주면서 스카풀라를 평생 착용한 사람이면 영원한 지옥의 벌을 면하게 도울 것이고 죽은 후 첫 번째 토요일에 하늘나라에 다다를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카르멜회를 통해 스카풀라 신심과 토요 특전 신심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카르멜회는 탁발 수도회로서 사목 활동의 일환으로 관상생활을 실천하는 그 자체를 가르치려 했습니다. 카르멜회 소속의 많은 영성가들과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영적 여정의 길로 인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 규칙서를 따르는 아우구스티노회

 

아우구스티노 수도회(Ordo Fratrum Sancti Augustini)는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가 직접 창설하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성과 그의 수도 규칙서 정신을 따라 은수생활을 하던 수도회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주교관에 설립했던 수도 공동체는 이후에 반달족의 박해를 피해 서유럽으로 진출했습니다. 이 수도 공동체는 중세 중기까지 한적한 곳에서 작은 규모로 기도와 참회의 삶을 살면서 은수생활을 실천했습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공동체 중에 아우구스티노 수도 규칙서를 따르던 은수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1243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교황 칙서를 통해 이탈리아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수도 공동체들이 아우구스티노 수도 규칙 아래에서 하나로 합치도록 권고했습니다. 따라서 1244년 각 공동체가 로마에서 함께 모여 안니발디(Riccardo Annibaldi, 1200/10~1276) 추기경 주재로 회의를 개최해 하나의 수도회로 합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은수생활을 지향했던 통합 수도회는 ‘아우구스티노의 은수자 수도회(Ordo Eremitarum Sancti Augustini)’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한편, 1256년 교황 알렉산더 4세(Alexander PP. IV, 재임 1254~1261)는 교황 칙서를 통해 아우구스티노 수도 규칙서를 따르던 공동체인 ‘요한 은수자들’ 및 ‘브레티노 은수자들’과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를 따르던 공동체인 ‘굴리엘모 은수자들’, ‘몬테 파발레 은수자들’ 및 ‘토스카나 은수자들’ 모두를 아우구스티노 수도 규칙서 아래에서 대통합을 이루라고 권고했습니다. 다시 안니발디 추기경 주재로 로마에서 회의를 개최한 그들은 합병을 결정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는 1290년 독일에서 개최했던 총회에서 회원 개정을 마무리했습니다. 다만 새로운 수도회를 더 이상 인준하지 않겠다던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와 제2차 리옹 공의회의 결정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에, 1298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카르멜회와 함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탁발 수도회로 인준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는 공동체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자신의 내면 성찰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수도 생활의 표본으로 생각하고 따르려고 노력했으며, 교회와 신앙의 수호를 위해 기꺼이 봉사했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는 ‘착한 의견의 성모’를 공경하는 신심으로 유명했습니다.

 

중세 서방 교회는 각종 수도회의 난립이 오히려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수도회 설립을 제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이 함께 했던 새로운 수도회는 교회로부터 인준을 받고 신자들에게 새로운 영적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제대로 담당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1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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