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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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 오늘에 되살리는 순교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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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8-05 ㅣ No.1330

오늘에 되살리는 순교영성



‘주님께서 저를 이끄셨으니 제가 여기에 있나이다.’

해발 1300m의 알프스의 깊은 산중,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영겁의 침묵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만들어 가며 살아가는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영화 ‘위대한 침묵’의 첫 장면에 나오는 은수자들의 담백한 신앙고백입니다.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이 깃든 천호성지에서 지낸 지 올해로 일곱 해가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고장이라 불리는 전주교구의 사제로서 이 거룩한 성지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큰 은총이며 축복이었습니다. 사목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성지는 오히려 영적 갈망을 지닌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곳입니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리고 위기 속에서 짜부라진 영혼을 안고 성지를 찾는 사람들은 이곳에 깃들어 있는 신앙의 기운을 선연히 느낍니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서 있었던 신앙 선조들의 삶을 묵상하며 그들의 눈길은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죽음보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늘 한 번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 굽어진 곱사등을 펴고, 두려움에 감았던 눈을 뜨고 서서히 현실을 바라볼 줄 알게 됩니다. 절망의 땅바닥에 주저앉아 구차하게 세상의 동정을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하혈하는 여인처럼 허무하게 텅 빈 채로 서서 생명력을 상실해가던 사람들이 생기를 얻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에서 겪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여정이 순교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에 순교로 응답한 우리 교구의 순교자들을 통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소명이 참으로 큽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물려주신 이 고귀한 순교영성을 오늘의 시대에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라’

이 시대의 교회와 세상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계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즉위 후 집전한 첫 미사에서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가장 큰 위기는 세속화임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십자가라는 신앙의 영적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뭔가를 짓고, 십자가 없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세속적인 존재일 뿐” 이며 “세속적인 가치를 앞세워도 교황이 되고, 주교, 사제가 될 수는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게 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공동체이지만,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키는 세속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의 참된 힘은 세상과 다른 영적 힘을 잃지 않는 데 있습니다. 신앙공동체가 지금 세상의 가치에 편승하고 윤리적인 문제들에 휩싸여 영적 진로를 잃게 되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상실한 채 세상에 동화되어가는 세속화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직면한 세속화, 영적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서 순교영성은 가장 근원적 방향과 대안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스스로 찾은 신앙 안에서 깨닫게 된 영적 진리는 인간의 근본에 대한 납득이었습니다. 즉 인간은 하느님께 속한 영적인 존재이며 하느님 안에서 인간의 참된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깨달음이었던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한 세속적 지혜가 아니라 복음과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제시된 영적 지혜를 통해 세상을 이기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은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영성을 갖추게 했고 삶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향하게 되고 하느님 안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게 하였습니다. 순교영성은 이러한 신앙의 영적 근본에서 비롯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순교영성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와 신앙인들이 신앙의 기본을 찾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영적 근본이 없는 교회는 세상을 향해, 세상을 위해 영적인 가치를 증거하고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교는 세상을 향해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는 행위이고 그것은 순교자들이 지닌 신앙의 영적 근본이 확고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순교자의 무덤을 꾸미고 그분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세상에 참된 진리를 증거하는 순교영성은 그 방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이러한 영적 현실에 대해 준엄하게 경고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그리고 이러한 위선적인 영적 상태는 더 큰 영적 허영을 만들어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마태 23,29-31).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0-11). 그분의 선택은 삶의 밑바닥에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투신이었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소중한 가치를 무시하고 약한 이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죽음의 문화에 맞서서 생명을 살리는 길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순교영성은 생명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영성입니다. 즉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지켜내야 할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길을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오늘날 신앙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 속에 퍼져가고 있는 심각한 죽음의 문화에 도전하는 전인적 투신은 이 시대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신앙인의 소명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 죽음의 문화를 퍼트리는 세력에 맞서 생명을 살리고 지키는 순교영성을 되찾는 일에 노력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오른다.’

인류의 역사에는 그 시대의 삶을 규정짓는 다양한 중심사고들이 존재했습니다. 사상이나 이념 혹은 유행으로 드러나는 시대의 중심사고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특징짓는 중심사고는 한 마디로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의식입니다. 현대의 인간중심의 사고가 만들어낸 삶의 방식과 그 결과는 피상적이고 잡다한 것들에 대한 임의적인 가치부여, 무책임한 개인주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 고통 받는 사람들과의 연대성의 결여를 가져왔고, 소위 ‘웰빙(Well-being)’이라 불리는 겉치레와 자아도취에 경도(傾倒)된 삶의 태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변화를 위한 내적 동기나 근원적 성찰이 없는 공허함으로 인해 개인과 사회를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한 순간도 차분히 머물지 못하게 하는 변화에의 강박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입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만이 강물을 거슬러 오릅니다. 물고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요, 물고기만의 생존 방식입니다. 강물은 아래로 흐르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오릅니다. 시대에 따라 온갖 유행과 사상, 이념, 가치체계는 한 시대를 흐르는 강물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강물은 도도하고 거침없이 시간을 가로질러 시대의 강둑을 따라 흘러갑니다. 이 거대한 시대의 강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순교영성은 신앙인으로서 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존재로 살아가는 힘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상징했던 단어는 익투스(ΙΧΘΥΣ)입니다. 물고기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들어낸 상징입니다. 박해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상대방이 그리스도인인지를 알기 위해 물고기 그림을 암호처럼 그려서 신앙을 확인했고 물고기를 그린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그리스도인들이 숨어살던 카타콤바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시대를 거슬러, 세상을 거슬러 하느님께로 헤엄쳐 오르던 살아 있는 물고기였습니다.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때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 모두가 “아니오!”라고 대답할 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은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순교영성은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대답할 줄 아는 신앙입니다. 이 결연한 선택은 자신 안에 중심이 얼마나 진실하게 존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내 삶을 지탱하는 중심, 내 신앙이 뿌리 내리고 있는 중심, 내 존재가 발을 디디고 있는 터전이 무엇인가의 문제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내 삶의 중심에 세속적인 가치가 더 크게 존재한다면 그것은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사제로서 내 삶의 중심에 인간적인 만족이 자리 잡고 있다면 사목자가 아니라 직업적 종교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중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없다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가 아니라 강물을 따라 표류하는 물고기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적당한 타협이 가져다주는 안정감과 만족감으로 시간을 채워나가는 것에 익숙해지면 신앙인의 삶은 마치 죽은 물고기처럼 더 이상 물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물을 따라 떠내려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종종 ‘예수는 좋다, 그러나 교회는 싫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시대의 강물 속에 생명력을 잃고 표류하는 교회에 대한 불신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서 근원적인 힘을 얻지 못하면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영적인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항상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분은 기발한 아이디어나 깜짝 놀랄 영성프로그램을 제시하기 보다는 항상 자신의 근원을 깊이 성찰하고 그 근원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악한 힘과 싸우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여 자신을 드러내고픈 유혹, 눈앞에 보이는 고통스런 현실을 잊게 해 줄 해결사로 세우려는 시도들, 전통이라고 불리는 고정관념 속에 폐쇄된 기득권자들이 만들어 놓은 완고한 흐름을 거슬러 헤엄쳐 올랐던 예수님은 그 강물 속에서 하느님을 향해 세상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셨습니다.

믿음살이는 끊임없이 흐르는 시대의 강물을 헤엄쳐 오르는 물길입니다. 때로는 물길을 따라 흐르지만 떠내려가서는 안 되며, 물길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온몸으로 솟구쳐 올라야 하는 힘든 생존의 현장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로 머무르게 되면 시대의 흐름 속에 표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교는 참된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죽음을 넘어선 사건의 총체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가치를 모든 가치보다 귀중하게 여기고 삶의 실천적 과제로 삼는 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순교자적 신앙의 자세인 것입니다. 첫 순교자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지금 눈앞에서 고통당하고 소외당하는 이웃을 향해 나를 내어 주는 삶, 자신을 바쳐 참된 가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고양된 인간의식에서 참된 순교영성이 자라납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증거할 차례입니다.”

1984년 한국교회의 103위 성인을 시성하는 자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교회에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순교의 역사 위에 세워지고 순교자들의 피로 자라난 한국천주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는 예언자적 요청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신앙선조들이 흘린 순교의 피를 밑거름으로 탄생했고 오늘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겪고 있는 심각한 영적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교회가 증거해야 할 신앙의 참모습은 점점 더 퇴색되어가고 있습니다. 신자 수 500만이 넘는 양적인 성장에 비해 신앙선조들이 지켰던 영적인 가치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졌기 때문에 신앙을 증거하는 열정도 식어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103위 한국성인의 탄생은 한국교회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랑스러운 선물입니다. 이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성인을 많이 모신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후 전개된 124위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 절차도 이제 그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성인들을 모시게 된 것은 우리 교회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그분들의 신앙 속에 담긴 영성을 깊이 이해하고 영성적으로 심화시키는 작업 또한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제일 것입니다.

103위 성인의 시성식 이후 한국교회가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물려주신 순교영성을 이 시대에 되살리는 일에 미흡했다는 반성은 계속되어온 일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주된 원인은 순교의 의미를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고 소개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순교는 영웅주의적 신앙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의 사건으로 머물게 되며 오늘날 일상의 삶에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고통들, 희생의 순간들을 순교와 연결시킬 수 있는 현실성을 찾기가 어렵게 됩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순교는 ‘죽음’이 아니라 ‘증거’로서의 의미가 더 현실성을 갖게 됩니다. 2012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주최한 ‘순교-국제심포지엄’에서 이브 마리 블렁사르 신부(파리가톨릭대학교 교수)는 요한 묵시록의 ‘증인(μαρτυζ; martyr)’(묵시 17,6)이라는 용어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순교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 신약성서의 유일한 문헌이라고 밝히면서, 묵시록에서 나타나는 순교의 의미는 ‘고통스럽고 일상적인 세상의 현실을 하느님 편에서 재해석해 보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승리하시고, 하느님께서 완성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합니다.

순교자들은 단순히 자신의 종교적 신념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의 삶과 신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과 세상에 대한 보편가치를 깊이 성찰하였고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그 답을 얻었으며, 그 영적인 깨달음을 자신의 삶으로 증언하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게 진리를 증거한 증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순교는 사랑하기 위해 견디어 내는 고통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치루어 내는 희생입니다. 같은 일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어려운 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큰 고통도 기쁘게 견디어 냅니다. 순교는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나를 내어주는 사랑이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기쁘게 바치는 결단입니다.

순교자들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고 자신의 삶을 통해 그 사랑을 열매 맺었습니다. 순교영성은 복음이 전하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복음을 위해 ‘기쁘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이 ‘복음의 기쁨’에 초대하십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한층 높은 차원에서 더욱 강렬한 삶을 살아갈 기회를 줍니다. 생명을 내어 줌으로써 더 자라고, 고립되고 안주하면 약해집니다. 참으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해주려는 열정에 불타오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화 과업을 맡으라고 촉구할 때, 이는 진정한 자아실현의 원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재의 또 다른 심오한 법칙을 발견합니다. 곧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내어주는 그만큼 생명을 얻고 또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복음 선포자는 장례식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열정을 되찾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할 때에도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을 되찾고, 이를 더욱 키우도록 합시다. 때로는 불안 속에서, 때로는 희망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현대 세계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낙심하고 낙담하며 성급하고 불안해하는 선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을 먼저 받아들여 열성으로 빛나는 삶을 살려는 복음의 봉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0항].

[쌍백합 45호, 2014년 여름, 김영수 헨리코 신부(천호피정의집 관장 · 천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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