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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대구대교구 순교자 20위2: 을해박해의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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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7-16 ㅣ No.1315

한국순교자 124위 시복을 앞두고 - 대구대교구 순교자 20위 ② 을해박해의 순교자들



오는 8월 16일 거행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앞두고 각 교구에서는 순교자 124위 관련 순례지 전대사 선포미사를 봉헌했다. 대구대교구 또한 지난 5월 17일(토) 전대사 지정 순례지 중 하나인 복자성당에서 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의 주례로 전대사 선포미사를 봉헌하며 교구민들이 하나되어 시복식을 준비하고 있다.


을해박해의 순교자

1815년, 순조 15년 경상도 지방에서만 발생한 을해박해에서 순교한 대구대교구 순교자는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김시우 알렉시오, 최봉한 프란치스코, 서석봉 안드레아 · 구성열 바르바라 부부, 김희성 프란치스코, 이시임 안나, 고성대 베드로 · 고성운 요셉 형제, 김종한 안드레아, 김화춘 야고보가 있다.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재의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에서 태어난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한 후 청송 노래산 교우촌(현재의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동)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던 중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됐다.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던 그녀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 마음이 약해져 배교했다. 감영에서 막 풀려난 그녀는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 안드레아와 부딪쳐 짧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로인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어 제 발로 감영으로 들어가 관장 앞에서 “아까는 혹형을 견디기 너무 어려워 천주님을 배반했지만 이것은 크나큰 죄로,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원하시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신자입니다.”라고 말했다. 관장이 그녀를 미친사람으로 몰아 내쫓았지만 김윤덕은 이전의 배교를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취소했고 관장은 화가 나 살점이 떨어져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매질했다. 의식을 잃은 그녀는 옥에 들어가자마자 숨을 거뒀다.

일명 ‘시회’, ‘시우재’라고 하는 김시우 알렉시오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고향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누이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거나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노력했다. 본래 성품이 착하고 어질고 학식도 있었던 김시우는 오른쪽 몸이 마비된 탓에 가난하여 때때로 왼손으로 교회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약간의 돈을 얻기도 했다. 고향을 떠난 김시우는 교우들이 살고 있는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재의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으로 이주했다. 을해박해 때 포졸들이 쳐들어와 교우들을 체포하자 스스로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안동으로 끌려갔다. 갖은 형벌을 받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신심은 형리들조차 칭찬할 정도였고 그는 그 와중에서도 천주교의 주요교리를 박해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신앙을 증거한 김시우는 동료들과 대구로 압송되어 형벌을 받던 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수난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감사께서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라는 말을 해서 턱이 부셔졌다. 다시 옥에 갇힌 그는 굶주림과 상처로 인해 33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이후 오랫동안 교우들 사이에는 그의 열심과 재능, 변론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교회의 영광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구에서 순교한 서석봉 안드레아·구성열 바르바라 부부의 사위인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어릴 때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했다.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은 그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집에 살면서 황사영 알렉시오와 최필공 토마스와 가깝게 지냈다. 모친이 사망하자 누이를 정약종의 집에 살게 하고 자신은 시골로 내려갔다. 이때 그는 동정을 지키며 살 생각이었지만 친척들의 권유로 마음을 바꾸어 서석봉의 딸과 혼인한다. 그후 최봉한은 가족들을 데리고 서석봉 부부와 함께 청송 노래산 교우촌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생활하던 중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됐다. 체포될 당시 그가 동료들에게 ‘문초를 당하게 되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뒤집어 씌우라.’고 한 사실이 알려져 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경주 감옥에 갇혔을 때 장모 구성열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 끊임없이 권면한 가운데 그 자신은 형벌 앞에서도 항상 겸손하고 꿋꿋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대구로 이송된 후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여러 차례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문을 당했지만 그의 용기와 신앙을 꺽지 못했다. 계속된 형벌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옥중에서 30세로 순교했다.

1815년 순교한 서석봉 안드레아와 1816년 순교한 구성열 바르바라 부부는 청송 노래산 교우촌에 사위 최봉한 프란치스코 부부와 이주하여 신자들과 살았다. 서석봉·구성열 부부는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된 후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성열은 혹독한 형벌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사위 최봉한의 권면 덕분으로 다시 신앙을 다잡고 형벌을 참아냈다. 부부는 사위와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갖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증거했다. 서석봉은 형벌로 쇠약해진 탓에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옥에서 순교했고 구성열은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들 부부의 사형판결에는 “서석봉과 구성열 부부는 천주교에 미혹되어 깨우칠 줄을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우들 사이에서 ‘경서’라고 알려진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어려서부터 전통 학문을 배웠지만 아버지가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이를 버리고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어 기도와 애긍생활을 실천해 나가며 언제나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썼다. 1801년 아버지가 순교한 뒤로 그의 신앙은 더욱 깊어져 아버지처럼 순교하겠다는 생각으로 더욱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이후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정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이때부터 그는 금욕생활을 하면서 고신극기를 실천하고 급한 성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양순함과 인내의 모범이 되기에 이르렀다. 을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곧은정으로 쳐들어왔을 때 산에 올라가 있던 김희성은 아들에게 “나는 천주님의 명을 따라가야 한다마는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온 집안을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극진히 모셔라.”고 한 후 하산하여 포졸들과 밀고자를 관대하게 대접하고 어머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며 위로했다. 또한 아내에게는 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자식들을 잘 가르친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부탁했다. 웃는 낯으로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김종한 안드레아와 함께 대구로 이송했고 그곳에서 다시 갖은 형벌을 받았지만 김희성은 관원들이 당황할 정도의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 주었다. 대구 감사는 그의 심지가 굳은 탓에 배교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동료들과 오랫동안 옥중생활을 하던 중 1816년 2월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임 안나는 나이가 들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본래 무관으로 이름이 나 있던 집안이었지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는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고 1827년 정해박해 때 옥사한 이성지 요한이 그녀의 오빠이다. 재색을 겸비한 이시임은 교리실천에 뛰어난 열성을 보였고 또 일찍이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했는데 이 때문에 가족들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다. 가족들을 위해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살기 위해 집을 나선 그녀를 교우인 뱃사공 박씨가 데려다 주기로 했지만 마음이 달라져 강제로 그녀와 혼인했고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그후 몇 해 안 되어 남편은 사망했고 그녀는 어린 아들 종악이를 홀로 키우며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또 언제부터인가 신자들이 모여 사는 진보 머루산 교우촌에 가서 산 그녀는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간 후 다시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으며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들이 죽는 괴로움도 겪었지만 결코 신앙심을 잃지 않았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고성대 베드로 · 고성운 요셉 형제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고성대는 본래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렸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뒤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이들 형제는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헌식적으로 간병하며 열심히 기도했다. 또한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데 열심이었으며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고성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기도 했지만 배교하여 집으로 돌아온 후 즉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이후 형제는 청송 노래산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중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됐다. 이들 형제는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경주 관장은 이들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한 다른 교우들을 대구 감사로 이송했다. 대구에서도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이 이어졌고 17개월이 넘는 옥중생활을 했던 형제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들 형제는 이때까지 혼인하지 않고 동정을 지켰다. 이들 형제에 대해 대구 감사는 “고성대·고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되어 깨달을 줄 모르며 엄한 형벌을 하면서 깨우쳐 주려고 했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그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1814년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성 김 데레사의 아버지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할아버지인 김종한 안드레아는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년 후 맏형인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박해 때마다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던 김종한 집안의 신앙은 오히려 굳건해져 언제든지 시련을 이겨낼 덕행을 갖추게 되었다. 부친 김진후가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형제들은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고 김종한 또한 가족들과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재의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그는 교리를 실천하는데 있어 열심이었고 끊임없는 기도생활과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행위는 일상적이었다.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가르쳤다. 또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도 노력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간 그는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됐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가 배교를 하고 석방되어 나가고 있었다.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했고 이에 감화되어 김윤덕은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했다. 김종한 또한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가 진리임을 설명했다. 그는 사형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옥중에서 2통의 편지를 썼다. 그 중 1통은 형에게 썼던 것으로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삼구(三仇)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김종한은 옥혀 갇혀 지낸 지 1년 6개월 정도 되어서야 사형을 받았고 이때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했다.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 베드로의 동생인 김화춘 야고보는 어릴 때 형과 함께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웠다.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켰으며 언제나 기도생활과 성경 읽기에 부지런하여 교우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했고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청송 일대를 수색하던 포졸들에게 잡혀 경주로 압송됐다. 그는 배교의 온갖 유혹을 받았지만 뿌리치고 고성대·고성운 형제와 구성열 등과 함께 대구로 이송됐다.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지내면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굳건히 지킨 김화춘의 신앙에 굴복한 감사가 마침내 사형을 선고했다. 그의 선고문에는 “김 야고보는 아버지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배워 대대로 죄악을 저질러 왔다. 모두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로 천주교 교리를 귀로 전해 듣고 입으로 외우면서 그 사악한 말을 깊이 믿었다.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죽기를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으니 그 요사하고 사악함이 아주 지극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옥중생활을 한 그는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참고문헌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

1984년 103위 시성식 이후 거행되는 124위 순교자 시복식을 앞두고 우리는 복음적 가치를 살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행동이, 실천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도로, 미사로, 순례로 함께 한다면 순교자들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그 아낌없는 모습을 조금이나마 따라 가는 삶이 아닐까 싶다.

[월간빛, 2014년 7월호, 김선자 수산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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