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마산교구의 순교자 5위: 순교자 구한선 타대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7-15 ㅣ No.1313

죽어 영원을 사는 사람들 - 마산교구의 순교자 5위


2. 순교자 구한선 타대오



구 타대오는 함안군 대산면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언제 영세 입교했는지 알 수 없지만 피난 교우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타대오는 체격이 건장하고 신앙심이 깊은 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박해시대에 선교사의 복사로 일한다는 것은 체력과 신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선교사의 복사는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다. 선교사의 짐을 지고 다녀야 했고, 낯선 사람들로부터 보호해야 했고, 지리에 밝아야 했고, 돈을 가지고 다니면서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사는 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하려니 힘도 세고 신앙심도 투철하고 가정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타대오는 병인박해 전(前)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리델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로 1869년 조선교구 6대 교구장이 되신 분이다. 리델 신부는 경상도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 남쪽의 교우촌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그때 구 타대오를 대동하고 다녔다.

당시 남쪽에는 많은 교우촌이 있었다. 함안의 대산지역, 사천, 문산, 하동, 곤양, 서포, 북천, 고성의 기월리, 황리 그리고 거제도 전역이었다. 이런 곳에 서양 신부를 모시고 다녔으니 구 타대오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병인박해가 본격화되자 리델 신부는 충청도로 떠나고 구 타대오는 진주에서 지내다 붙잡힌다.

그는 감옥에 갇혀 며칠 동안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그의 몸은 심한 매질과 고문으로 성한 곳이 없었다. 결국,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포졸들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순교자는 본가로 돌아온 뒤 칠일 만에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당시 나이 23세였다. 그의 순교는 장하치명(杖下致命)으로 기록되어 있다. 매질과 고문의 결과로 죽게 되었다는 말이다.

순교자는 특별히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유는 선교사가 있는 곳을 대라는 고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교우촌을 돌아다녔으니 그곳에 대한 정보를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는 배교도, 배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매를 맞았겠는가. 결국, 매를 맞아 순교한 것이다.

순교자의 무덤은 1959년 당시 함안본당 신부였던 제찬규(諸璨奎) 신부의 노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 신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순교자의 무덤을 찾으려 애쓰다 대산공소 회장이었던 윤성학(尹聖學) 바오로의 증언을 듣게 된다. 그는 구 타대오의 처조카인 최성순(崔聖淳)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최성순은 순교자의 아들이 부친의 무덤을 사토(莎土)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교자의 무덤은 신(愼)씨들의 묘소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증언을 바탕으로 여러 과정을 거쳐 순교자의 무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후 대산본당 초대 주임이었던 정중규(鄭中奎 클라로) 신부가 순교자의 무덤이 외교인의 묘역 안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현재 위치인 평림리 가등산으로 이장하였다(1976년 9월). 그러다가 2002년 5월부터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였다. 영남 순교사에 의하면 구 타대오에겐 아들이 있었는데 전북 장수 광대골 공소회장을 역임했고 그의 사위 역시 공소회장을 했다고 한다.

순교자 관계 사료집
치명일기 831, 병인순교자 증언록 163번, 박순집 증언록 3권 34면, 하느님의 종 109(306쪽)

구한선 타대오 순교자 묘소
주소 :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733-1(가등마을)
문의 : 055)582-8041

[2014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일 가톨릭마산 3면]



1,07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