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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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대구지역 순교자: 박경화 바오로의 순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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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7-15 ㅣ No.1311

[대구지역 순교자 20위의 삶을 묵상하며 - 대구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애주애인(愛主愛人)


박경화 바오로(1757-1827)의 순교 이야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쉬운데 늘 곁에 있는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기는 왜 그리 어려운지…. 그런 때마다 주님께서는 일깨워 주신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만큼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전히 자신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임을…. 순교자 박경화 바오로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박경화 바오로는 33세 무렵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본래 그는 제법 재산도 있는데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입교한 얼마 후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나왔다. 하지만 배교로 인해 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고향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그런 후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고 비신자들을 입교시키고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자녀들이 덕행을 잘 닦을 수 있도록 모범을 보였다. 비록 그의 살림은 가난하였지만 그를 찾아오는 교우들에게 항상 정성껏 대접하였음으로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1827년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자 그는 교우들을 안심시킨 뒤,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하여 그해 음력 4월 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었다. 상주관아에서 그는 교우들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더 많은 형벌을 받았으나 그의 신앙은 조금도 꺾이지 않고 관장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내 육신은 관장에게 맡기지만, 영혼은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다시 대구 감영으로 이송 된 그는 노령에다 여러 차례의 형벌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어 옥사하게 되었다. 당시 감옥에서 아들 박사의 안드레아 함께 고문을 겪으며 부자간에 보여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한번은 관장의 명령에 따라 그가 한 승려와 교리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포졸들은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훗날 다블뤼 주교는 “뛰어난 친절, 변함없는 온화, 지극히 관대하게 베풀었던 덕행, 교우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던 열성, 그리고 항상 눈길을 끄는 모범을 보여주었던 그의 모든 덕성들은 그를 진정한 가장(家長)”으로서, “참으로 세속을 버린 사람”으로 기록하였다.

순교자 박경화 바오로님! 저희도 세상 것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행복으로 살 수 있는 은총을 빌어주소서.

[2014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일 대구주보 4면, 글 대구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그림 김효애 크리스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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