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2014-0427.....부활2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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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4-04-26 ㅣ No.1515

                                            

부활 제2주일 (가해)

사도행전 2,42-47         베드로11,3-9      요한 20,19-31

2014. 4. 27. 등촌3

주제 :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필요한 것

찬미예수님! 예수님의 부활시기를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흔히 이렇게 질문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대답은 기쁘게’/혹은/‘이라는 말과 함께 긍정하는 표현이 있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오늘은 부활대축일로부터 8일째가 되는 날, 부활2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은 사람에게 찾아오는 세상의 고통과 힘겨움이 영원한 것은 아니고, 사람의 삶을 힘들게 하는 세상의 것들은 끝이 있음을 알려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아주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질 바람이고, 기대이지만, 지난 416일 오전시간에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배가 침몰한 현실적인 사건 때문에 올해 부활은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할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일이 생기면, 많은 일들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런 일들이 생긴 이유가 무엇인지 원인을 찾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 힘겨운 일에 내가 끼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쉽게 잊습니다.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 희생자들과 가까웠을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오래가겠지만, 쉽게 잊는 우리민족의 특성에 따라 그런 일들을 해결하기 위한 뒷수습도 그저 쉽게 잊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실적위주와 경쟁사회, 그리고 빨리빨리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모습, 능률과 실질을 위해서라면 안전은 희생돼도 좋다는 인명경시풍조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과거에는 안전을 희생하는 것이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장점도 되었겠지만, 내가 그 피해자가 된 때에는 헤어날 수 없도록 사람의 삶을 파괴한다는 것을 무시하고 우리나라는 집단의 이름으로 아주 쉽게 잊습니다.

 

이렇게 묘한 것들이 융합되어 현재를 이루는 우리나라 사회에,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평화는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날에 일어난 일을 전하는 오늘 복음에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비는 말씀을 하셨다고 전해줍니다. 부활하신 다음날 저녁에 두 번 그리고 그로부터 한 주간이 지난 뒤에 한 번 더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부활(復活)은 세상에 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일까요? 신앙인이라면, 이렇게 하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대답을 할 거라고 말하고 싶다면, 요한복음사가가 전하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도들과 제자들은 왜 그렇게 두려운 마음을 보였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하여 같은 말을 인사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게 더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기에 우리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과 다른 의도를 담아서 특별한 인사를 하셨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는 필요할까요? 필요하다고 하는 소리는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그 평화는 왜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필요한 평화를 없애거나 깨는 자는 누구인지 질문해야 하고 그 대답을 찾아야만 우리가 필요하다고 하는 평화가 우리네 삶에 머물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독서는 우리네 삶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또 평화가 머물게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간단하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해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다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이 알려주는 그 방법을 우리는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도행전이 전하고 있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을 체험한 초대교회공동체가 알려주는 방법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초창기 교회의 모습을 전하는 공생적 사회주의에서 19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 나타난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 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놓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됐습니다. 아니 쉽지 않은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난 성주간 수요일(4/16)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건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자가 발생한 사건도 알고 보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한 자본주의 방식을 충실히 따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누구에게나 있을 이러한 마음과 생각을 어떤 방법으로 정리하겠습니까? 우리가 누구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들어야만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서 이런 일들이 사라지겠습니까?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 그 방법대로 삶을 변화시켜서 사람들의 삶에 더 이상 슬픔이 없게 한다면 참 좋으련만, 그 일은 누가 할 일이겠습니까?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이 세상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나서 이상한 모습으로 바뀌거나 멸망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현재모습보다 더 낫고 더 좋은 곳으로 바뀔 수 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분명히 뛰어난 선물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서 세상 삶에 드러나게 만들 수 있을 때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느님의 나라로 바뀔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사도가 편지에서 적는 것처럼, 세상 삶에서는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하겠지만, 그런 일에서도 기쁨을 향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하느님나라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에서 자포자기(自暴自棄,=절망에 빠져 자신을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음)한 마음과 그러한 태도로 산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실현되지 않을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르게 살아갈 마음자세를 갖추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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