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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동서 교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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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9 ㅣ No.147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동서 교회의 분열

 

 

비잔틴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샤를 대제에게 기댔던 서방 교회는 왕국의 분열과 몰락으로 음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 사로잡혔다. 동방의 비잔틴 제국과는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북방 민족들의 침입과 동방 사라센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사회든 교회든 윤리도덕을 외면하는 무질서가 극에 이르렀다.

 

그때에 교황 니콜라오 1세가 교회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일부 주교들은 목자의 직무를 저버리고 세속 군주처럼 불의와 폭력에 의지해 영지나 교회를 다스렸다. 교황의 수위권이나 사도좌의 권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교황은 라벤나, 트리어, 쾰른 등지의 대주교들을 파문하였다.

 

그런데 동방의 비잔틴 제국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이냐티우스가 무슨 교회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포티우스가 불법적으로 총대주교좌를 차지하였다. 교황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동방의 여러 총대주교좌에 서한을 보내 포티우스를 승인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863년에 열린 로마 교회회의에서 포티우스를 파문하였다.

 

 

갈등과 분열은 깊어지고

 

이냐티우스는 실제로 교회법 위반 때문이 아니라 황제의 숙부이며 제2황제(카이사르)인 바르다스가 며느리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비난하다가 투옥되었다고 한다. 그 빈자리를 황제의 시종장(제1서기) 포티우스가 차지하였다. 섭정 황후의 사돈으로 성직자가 아니었던 그는 독서직부터 시작하여 총대주교 축성까지 모든 성품 예식을 엿새 만에 해치우고, 총대주교좌에 앉았다.

 

그러나 포티우스는 신학이나 철학은 물론 문학, 과학, 의학 등 모든 분야의 학문을 섭렵해 매우 박학다식하였으며, 제국 내의 모든 문제에 정통하여 당대의 천재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황실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서방 교회와 교황에게 거칠게 대항하였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성령 부분에 “(성부)와 성자”(Filioque)를 덧붙인 서방 교회를 비난하며, 황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의 우선권을 내세웠다. 그는 보편교회에 대한 교황의 재치권, 곧 수위권을 부정하며, 867년의 한 교회회의에서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하였다. 이 사건이 이른바 포티우스 분열[離敎]이다. 교회 개혁과 교황권의 확립을 위하여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준 니콜라오 1세, 제2의 엘리야라 불린 교황은 그해에 세상을 떠나고, 아드리아노 2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일치와 화해를 향하여

 

그러는 가운데 제국의 왕조가 바뀌었다. 권력이 바뀌자 상황이 돌변하였다. 포티우스가 총대주교좌에서 쫓겨나고 이냐티우스가 복권되었다. 미카엘 3세를 살해하고 새로운 마케도니아 왕조를 세운 황제 바실리우스 1세는 교황과 우호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황제는 교황에게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자고 제안하며, 제국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데에 협력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교황이 동의하고 사절들을 파견하였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869년 10월 5일부터 870년 2월 28일까지 소피아 주교좌 성당에서 열렸다. 100여 명에 지나지 않은 소수의 주교만으로 시작된 이공의회에서는 참석자들에게 로마 사도좌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공의회는 주로 포티우스 문제를 다루었다. 제5차 회기에 포티우스가 끌려나왔다. 그는 저주스럽게도 카야파와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를 흉내 내어 온갖 신문에 거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7차 회기에 다시 나와 옛날 교회법 규정에 따라서 교회의 인사문제 등을 교황이 아니라 황제에게 문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공의회에서 파문당하고 보스포루스 섬에 유배되었다.

 

 

로마 베드로 사도좌의 수위권

 

이 공의회에서는 성화상 공경을 재확인하는 등 27개 규정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세속의 어떠한 권력자도 주교 임명이나 서품을 하지 못하며, 교황이나 총대주교를 모독하거나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자를 파문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전통적인 총대주교좌의 서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사도좌 다음으로 올려, 그 순서를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으로 명시하였다. 포티우스나 디오스코루스처럼 첫째 사도인 베드로 좌를 모욕하면 파문을 당한다. 아무도 말이나 글로 교황을 반대하는 주장을 할 수 없다. 교황은 이러한 공의회의 결정들을 추인하였다. 이렇게 동서 교회의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고 교황의 수위권이 확립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복권된 이냐티우스 총대주교도 교황에게 별로 고마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통적으로 로마 사도좌에 속해있던 불가리아 지방에 대주교를 임명하고 그리스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관할 구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라틴계 성직자들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포티우스가 다시 총대주교가 된 다음에는 그 분열의 골이 더 깊어져, 완전한 결별로 이어지고 만다.

 

 

천재 성인인가, 분열의 악마인가

 

포티우스는 공의회에서 파문당한 뒤에도 탁월한 친화력으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태자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다. 이냐티우스가 죽은 다음에 그는 다시 총대주교 자리에 올랐다. 모든 사람이 그를 원한다는 황제의 말에 교황 요한 8세도 그의 사면과 복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던 포티우스는 879년 11월에 교황사절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공의회를 다시 열어, 자신을 파문하였던 이전 공의회의 모든 결정을 무효화하고 불가리아를 자기 총대주교좌에 편입시켰다. 교황은 당연히 그를 다시 파문하였다.

 

이렇게 하여 돌이킬 수 없는 동서 교회의 분열이 공의회를 통하여 확인되고 있다. 서방 교회에서는 869년의 회의를 여덟 번째 세계 공의회로 인정하지만, 동방 교회에서는 이를 강도 공의회라고 비난하며, 879년의 회의를 세계 공의회라고 주장한다. 서방에서는 이냐티우스를 성인으로 공경하지만, 동방에서는 천재적인 포티우스를 대성인으로 추앙한다. 동서 교회 분열의 주역을 맡지만 않았다면, 그는 서방에서도 중세의 마지막 대교부로 존경을 받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는 886년 새 황제에게 다시 쫓겨나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수녀원에서 뛰쳐나온 어머니가 마귀를 낳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는 이야기마저 전해진다. 그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경향잡지, 2007년 10월호,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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