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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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4: 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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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05 ㅣ No.661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4) 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②


1564년 ‘성 마티아의 요한’ 수도자로 거듭나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4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살라망카대학.


홀어머니를 도와 간호사가 되다

남편을 여의고 두 아들을 키워야 했던 십자가 성 요한의 어머니는 결국 국제무역으로 유명한 메디나 델 캄포에 둥지를 틀게 됩니다. 당시 그곳에는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나 고아들을 위한 교리학교가 있었는데, 어린 요한은 여기서 읽고 쓰는 것을 배우며 처음으로 정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요한은 나름대로 공부를 잘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 있던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에서 미사 복사도 했습니다. 요한은 어머니를 도와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놀기도 했지만 일찍부터 고생을 하며 자라서 같은 또래의 다른 소년들에 비해 한결 민감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의 지도 신부셨던 알론소 알바레스 신부님은 이 어린 요한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런데 알론소 신부님은 메디나 델 캄포의 ‘부바’라고 하는 병원의 책임자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성실하고 사려 깊은 이 어린아이를 도와주기로 하고 자신의 병원에서 남자 간호사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홀어머니를 도와줄 수 있는 일자리를 갖게 된 것이 매우 좋았던 요한은 그때부터 병원에서 성심껏 일하게 됩니다.


예수회 학교에서의 학업

이런 요한이 마음에 들었던 병원장 알론소 알바레스 신부님은 당시 그 도시에서 예수회 신부님들이 새로 설립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그곳은 오늘날에 비교하자면 중·고등학교로 성인은 여기서 문법, 수사학, 형이상학, 라틴어, 스페인 고전 등을 배우게 됩니다. 요한은 1559년부터 1563년까지 4년간 이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병원에서 일하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과정을 거치며 소년 요한의 마음 안에는 점차 하느님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마칠 무렵, 병원장이신 알론소 신부님은 요한이 사제품을 받아서 병원의 원목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병원 입장에서는 미사와 고해성사를 병자들에게 마음 놓고 줄 수 있고 요한의 입장에서도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분의 그러한 호의를 알면서도 보다 깊은 자기 내면의 원의에 따라 그것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정중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가르멜 수도자가 되다

당시 메디나 델 캄포에는 1560년에 설립된 가르멜 수도원이 있었는데, 요한은 1563년 예수회 학교를 마치자 이 수도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성모 신심이 깊었던 요한은 다른 수도회보다 가르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는 가르멜 수도회에 마음이 끌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1년간 수련을 받았습니다. 당시 수도원은 아주 작았으며 요한의 방은 아주 비좁고 어두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굳은 결의를 하고 헌신적으로 수도 생활에 정진했습니다.

요한은 천성적으로 상냥하고 감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런 성격은 병원에서 일하면서 많이 계발됐지만, 다른 한편으로 침묵과 고독을 참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련기 동안 함께 살았던 수사님들은 엄격하고 침묵과 고독을 추구했던 그의 모습으로 인해 조금은 기이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형제들은 그의 성실하고 진지한 모습을 칭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지나치게 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합니다. 그래서 훗날 요한이 장상이 됐을 때 이 초기의 인상 때문에 많은 수사님은 그가 지나치게 엄격하리라고 예상하고 요한이 장상으로 임명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상과 달리 요한은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공동체 형제들에게는 따스한 형제애를 전했고 특히 아픈 형제들에게는 지극 정성으로 대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1564년 5월 21일 메디나 델 캄포의 가르멜 수도원에서 ‘성 마티아의 요한 수사’라는 이름으로 서원을 했습니다.


살라망카에서의 철학과 신학 공부

수련을 마치고 서원을 한 청년 요한 수사는 학업을 위해 메디나 델 캄포를 떠나 학문의 도시인 살라망카로 가게 됩니다. 이 도시는 중세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스콜라 신학이 크게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중세 때 교회의 학문적 전통을 지탱해 주던 도미니코 수도회를 비롯해 여러 수도회의 많은 학자 신부님들이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살라망카대학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신학대전을 바탕으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던 요람으로, 20세기 중반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교회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를 주도한 당대의 최고 석학 신부들이 소위 ‘살라망카 학파’라는 학자 그룹을 이뤄서 활동하던 곳이었습니다.

요한은 바로 여기서 만 4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성인의 여러 작품을 보면 학문적인 토대가 탄탄하며 체계적인 틀을 갖고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나간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그 시절 최고 학부인 살라망카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인은 이곳에서 다양한 학문과 사람들을 접하면서 학업뿐만 아니라 예전보다 훨씬 더 균형 잡힌 성품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는 따스하고 정이 많았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던 성인의 성품은 살라망카 시절에 형성됐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3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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