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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칼 라너 (6) 교회 전통 가르침의 현대적 해석에 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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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12 ㅣ No.1126

[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칼 라너 (6) 교회 전통 가르침의 현대적 해석에 일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회기 모습.

 

 

교황청이 제기한 의혹들 

 

라너는 교황청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의혹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신신학(nouvelle thologie)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심이었다. 신신학은 전통적인 스콜라 신학에서 벗어나 성경과 교부들의 문헌을 바탕으로 역사 비평적 방법론을 통해 하는 새로운 신학적 흐름이다. 이는 로마에서 볼 때 주관주의와 상대주의 위험에 노출된 것이었다. 따라서 신신학의 핵심 역할을 했던 예수회원 앙리 드 뤼박(Henry de Lubac) 신부는 비오 12세 교황에게 단죄를 받았다. 그는 나중에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학준비위원회 자문으로 위촉돼 복권됐다. 뤼박은 동료인 이브 콩가르(Yves Congar)와 장 다니엘루(Jean Denilou)와 함께 1983년 추기경에 서임됐다. 

 

라너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사 공동 집전’ 문제로 또 한 번 고초를 겪는다. 당시 교회법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미사를 공동 집전하지 못하도록 했다. 라너는 교부들의 저서를 바탕으로 「다수의 미사와 하나의 희생(Die vielen Messen und das eine Opfer)」이라는 논문을 1951년 선보였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미사 공동 집전은 잘 실천되지 않았을 뿐 교회의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공동 집전이 허가되지 않는 것은 한 미사 안에서 다수의 사제로 말미암아 오직 한 성체성사를 거행하게 되므로 하느님의 은총이 적게 베풀어진다는 두려움에서 온 것뿐”이라고 보았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4년 이 문제를 더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을 통해 라너에게 간접적으로 경고했다. 그러나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공동 집전을 허용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을 알현했을 때 라너는 이렇게 말했다. “10여 년 전 교황청이 저에게 공동 집전에 대해 더는 언급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이에 교황은 라틴말로 다음과 같이 답했다. “Est tempus flendi, est tempus ridendi.”(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는 법이지요)

 

1962년 6월 7일 라너는 로마의 예수회 총장 얀센 신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모든 출판물을 로마로부터 직접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라너는 얀센 총장 신부를 면담하고 이 결정이 예수회가 아닌 교황청 검사성성(현 신앙교리성)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검사성성 장관은 알프레도 오타비아니(Alfredo Ottaviani) 추기경이었다. 

 

라너에 대한 출판 제재는 독일 언론에 보도됐다. 라너가 속한 학술연구회인 바오로회(Paulus Gesellschaft) 위원장 켈너(Kellner)는 저명인사 25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독일 수상 콘라드 아데나우어(Konrad Adenauer)를 통해 교황청에 항의 서한을 전달하기로 했다. 라너는 쾨니히 추기경의 주선으로 검사성성 장관인 오타비아니 추기경과 만났다.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라너에게 “로마에서 우리가 당신에게 반대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이러한 검열을 통해 당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당신의 친구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하나의 특권”이라고 말했다. 이에 라너는 “나는 그러한 특권을 포기하겠다. 내가 특권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1963년 5월 23일 라너는 사전 검열 조치로부터 해제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라너는 성사론에 대한 공의회 준비위원회의 자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의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그는 단지 논고를 제출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에 비엔나교구장 쾨니히 추기경은 라너를 자신의 개인 자문으로 위촉했다. 라너는 오직 쾨니히 추기경을 통해 교의신학적 문제에 대한 소견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쾨니히 추기경의 입장에서 보면 라너를 통해 로마 신학자들의 보수적 경향에 대응하려는 전략이었다. 

 

로마의 신학자들이 작성한 공의회 초안에 주교들은 찬반 투표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주교들과 함께 그 주제들에 대해 토의하고 자문을 받아 그 결과를 초안으로 삼기로 했다. 요한 23세 교황은 현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나아가 전통 가르침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을 반대했다. 쾨니히 추기경의 입장에서 보면 전통 가르침을 현대적 사고에 어울리게 신학을 펼치는 이가 필요했는데 그가 바로 칼 라너였다. 

 

칼 라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교회헌장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초안 작성에 관여했다. 여기서 그는 지역 주교에 의해 인도되는 지역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로마 중심주의를 교정하고자 시도했다. 라너는 교회의 보편성을 강조해 교회의 유럽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또 사목헌장 작성에도 공헌했다. 그는 이미 작성된 초안에 비판적이었다. 사목헌장 초안에는 원죄론과 본죄론을 명백히 다루지 않았다. 

 

라너에게 공의회는 신학, 교의학 그리고 주석학의 뿌리 깊은 변화와 새로운 출발이었다. 비록 라너가 공의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 많은 영향을 미쳤다. 라너는 자신이 공의회의 배후인물(Holy ghost writer)임을 부정한다. 공의회 문헌에서 라너의 필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너는 종신부제직을 찬성했다. 라너의 신학적 성찰은 1997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에 2만 2900여 명의 종신 부제가 존재하게 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공의회 동안 되프너 추기경과 함께 게르마니쿰에 머물렀다. 여기서 그는 칼 레만을 알게 된다. 레만은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라너의 조교였다. 1968년부터 교수로 활동하다 1983년 마인츠(Mainz)교구장으로 임명됐고 독일 주교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2016년 은퇴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3월 11일, 이규성 신부(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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