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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65: 14세기 (6) 아비뇽 교황직 시대와 시에나의 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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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12 ㅣ No.1125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65) 14세기 ⑥ 아비뇽 교황직 시대와 시에나의 가타리나


위기에 빠진 그리스도교 새로운 영성의 길을 찾다

 

 

- 아비뇽 시대를 마감하고 로마로 귀환하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중세 말엽 유럽은 격동의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정치 분야에서는 세속 권력과 교회 내부의 정치 세력이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사회 분야에서는 유행성 전염병의 출현과 교황청 이전이라는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문화 분야에서는 인문주의와 문예부흥이 출현하면서 교회에까지 새로운 분위기와 시각을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에도 위기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 실천에도 혼동을 일으켰습니다.

 

 

아비뇽 교황청과 아비뇽 대립교황

 

교회 안팎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요인으로 ‘아비뇽 유폐(幽閉)’ 혹은 ‘아비뇽 유수(幽囚)’라고도 하는 ‘아비뇽 교황직’(Avignon Papacy) 시대(1309~1377)가 열렸습니다. 프랑스 출신으로서 보르도(Bordeaux) 대교구장이었던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PP. V, 재임 1305~1314)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Philippe IV, 재위 1285~1314)의 영향력에 눌려 리옹(Lyon)에서 교황 즉위식을 갖고, 프랑스 서부 푸아티에(Poitiers)에서 머물렀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09년 프랑스 국왕의 영토가 아니었던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이주했으나, 프랑스 국왕에게 휘둘리는 아비뇽 교황직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때 이탈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간섭을 받게 되었고, 로마는 귀족 가문들의 정치 투쟁의 장이 되었습니다.

 

아비뇽의 여섯 번째 교황이었던 프랑스 출신 교황 우르바누스 5세(Urbanus PP. V, 재임 1362~1370)는 전임 교황들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려고 이탈리아를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한편 교황 우르바누스 5세는 1367년 교황으로서 로마를 다시 방문했고, 교황청 이전까지 계획했으나 프랑스 추기경단의 만류로 1370년에 아비뇽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비뇽의 일곱 번째 교황이었던 프랑스 출신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PP. XI, 재임 1370~1378)는 시에나의 카타리나(Catharina Senensis, 1347~1380)의 호소와 충고에 힘입어 1376년 교황청을 로마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고, 1377년 로마에 도착하면서 아비뇽 교황직 시대를 끝냈습니다.

 

하지만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사망하자, ‘서구 이교’(離敎)라고 하는 서방 교회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후임으로 교황 우르바누스 6세(Urbanus PP. VI, 재임 1378~1389)가 선출되었지만,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강압에 의한 선거였다며 무효를 선언하고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PP. VII, 재임 1378~1394)를 선출하고 아비뇽에 머물게 했습니다. 양쪽 진영은 서로에게 순명할 것을 요구하며, 상대 지지자들을 파문했습니다. 중립을 지킬 수 없었던 그리스도인은 40여 년간 분열 속에서 혼동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교회 분열을 해결하고자 1409년 개최되었던 피사(Pisa) 공의회가 또 다른 대립교황 알렉산델 5세(Alexander PP. V, 재임 1409~1410)를 선출하면서 교회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결국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가 1417년 교황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PP. V, 재임 1417~1431)를 선출하면서 교회 분열이 종식되었습니다.

 

 

흑사병 발병과 인문주의 출현

 

아비뇽 교황직 시대에 유럽 사회와 교회는 사회, 문화적으로도 여러 가지 어려움과 혼동을 경험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PP. VI, 재임 1342~1352) 시절인 1347~1351년 유럽 전역에서 유행성 전염병이었던 흑사병이 창궐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도 아비뇽에서 흑사병 환자들을 돌보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아비뇽과 인근 지역에 흑사병으로 죽은 이들을 위한 매장터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흑사병의 원인으로 유럽에 거주하는 유다인들을 지목하고 그들을 대량 학살했습니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유다인들을 보호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로 불리는 이탈리아 아레초(Arezzo) 출신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8세 때에 부모와 함께 아비뇽으로 이주했습니다. 페트라르카는 1333~1336년 북유럽을 경유해 로마까지 여행하면서 고대 유럽 역사를 재조명하며 아비뇽 교황좌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1337년 아비뇽으로 돌아온 페트라르카는 인근 보클뤼즈(Vaucluse)에서 은수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스토아 철학의 염세주의적인 분위기를 첨가한 논조로 저술 작업을 했습니다. 그 당시 페트라르카는 대부분 고통과 죽음, 덕행과 악행 및 윤리와 같은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페트라르카를 성직에 임명했으나, 페트라르카는 교회와 거리를 두면서도 3대에 걸친 교황들에게 교황청을 로마로 옮기라고 강력하게 호소했습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신비체험가인 시에나의 가타리나

 

한편 이탈리아 출신인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아비뇽 교황직 시대와 흑사병의 창궐로 사회와 교회가 어둡고 부정적인 분위기에 쌓여 있는 가운데 적극적이며 활동적인 영성생활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활동하며 기도하는 수도생활을 동경했던 가타리나는 16세에 도미니코회 제3회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미 유년기 때부터 환시를 체험했던 가타리나는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와 마리아 및 성인들에 대한 환시를 더욱 자주 체험했습니다. 특히 가타리나는 병자를 돌보는 일을 즐겨했으며,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를 설득해 교황청이 로마로 귀환하는 데 큰 기여를 하면서 실천하는 영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가타리나는 생애 말년에 오상을 체험했습니다.

 

가타리나는 저서 「섭리에 대한 대화(Dialogo della Provvidenza)」에서 자신의 신비체험을 하느님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묘사했습니다. 가타리나는 저서에서 자신의 성화, 인류 구원과 교회의 평화, 성직자 개혁, 영혼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섭리 등을 언급했습니다. 또한 가타리나는 영적 발전의 단계를 사랑의 세 단계로 묘사했습니다. 즉, 비굴한 사랑, 보상을 바라는 사랑, 효경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최상의 사랑의 상태에서 인간 영혼은 하느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탁하지만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인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말엽 그리스도인들은 라인랜드와 로우랜드 신비신학자들과 영성가들의 활동을 통해 개념을 생각하는 사변적인 영성에서 예수의 삶을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모방하는 영성으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교회 안팎에서 정치, 사회, 문화적인 요인으로 어둡고 부정적으로 흐르던 분위기 속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영성가들이 나타나면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영성이 출현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던 교회는 문예부흥의 출현으로 근세에 새로운 영성 사조를 만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3월 11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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