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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64: 14세기 (5) 잉글랜드 여성 영성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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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04 ㅣ No.1121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64) 14세기 ⑤ 잉글랜드 여성 영성가들


감성으로 풀어낸 신비체험… 그리스도인의 공감 얻다

 

 

노리치의 줄리안.

 

 

잉글랜드에서도 여성 은수자들 및 신비체험가들이 출현했습니다. 그들은 영어로 작품을 저술한 작가로도 활약했으며, 그들 중에서「무지의 구름」의 저자 못지않게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도 있었습니다.

 

 

은수 생활을 실천한 노리치의 줄리안

 

14세기 잉글랜드에서 두 번째로 커다란 도시였던 노리치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2~1416)은 일찍이 캐로(Carrow)의 베네딕토회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으며, 중세 여성들이 흔히 사용했던 ‘줄리안’이라는 그녀의 이름도 훗날 노리치의 성 율리안나 성당에서 은수생활을 했던 연유로 수도명처럼 불린 이름일 뿐이지 실제 이름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30세쯤이었던 1373년 거의 죽어가던 줄리안에게 임종을 준비하는 병자 성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본당 신부가 방문했습니다. 예식 중에 본당 신부는 침대에 누워 있는 줄리안의 발치에서 십자가를 들어 보였습니다. 십자가를 응시하던 줄리안은 갑자기 시야가 깜깜해지고 육신에 감각이 없어지더니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줄리안은 몇 시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15가지 환시를 보았으며, 다음 날 다시 결론적인 환시를 보았습니다. 이 환시는 며칠 후에 줄리안이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야 끝났습니다. 신비체험을 한 후에 줄리안은 즉시 자신이 목격한 환시에 대한 작품을 25장의 짧은 구성으로 저술(짧은 책)했습니다.

 

신비체험 이후에 줄리안은 성 율리안나 성당에 은수처를 마련하고 은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줄리안이 미혼이었다는 견해도 있었지만, 14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어 과부가 된 줄리안이 전염병을 피해 은수자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줄리안이 은수생활을 시작할 때 수도자 신분이었는지 평신도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줄리안은 은수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삼위일체를 깊이 묵상하면서 자신의 신비체험을 신학적으로 숙고했습니다. 결국 20여년 후 줄리안은 환시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탐구한 작품을 86장의 긴 구성으로 다시 저술(긴 책)했습니다. 베네딕토회 수도자였으며, 잉글랜드에 추기경이었던 애담 이스턴(Adam Easton, 1328/38~1397)은 줄리안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줄리안의 은수생활에 도움을 주었으며, 줄리안이 긴 구성의 작품을 저술할 때에 편집자로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줄리안은 잉글랜드에서 영어로 작품을 남긴 첫 번째 여성 작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지속적인 사랑에 희망을 두는 신비체험

 

줄리안의 영성은 청원 기도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줄리안은 저서 「신적 사랑의 16가지 계시」(Sixteen Revelations of Divine Love)에서 하느님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분명히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 육신이 질병에 걸리는 것, 세 가지 상처를 선물로 받고 싶다는 것을 청원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언급했으며(짧은 책, 1장; 긴 책, 2장) 세 가지 상처는 통회의 상처, 자비의 상처, 하느님을 향한 열망의 상처라고 설명했습니다.(긴 책, 2장)

 

따라서 줄리안은 계시를 통해 먼저 삼위일체 신비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해하며 구원에 다가갔습니다. 다음으로 줄리안은 죄의 결과가 고통이지만, 고통을 통해 정화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되므로 죄의 기능도 구원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끝으로 줄리안은 그리스도가 수난당하신 것이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기에 인간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머물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줄리안의 작품은 당대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훗날 여러 나라에서 읽혔습니다. 또한 줄리안은 잉글랜드에 아주 중요한 신비체험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공회와 루터교는 줄리안을 공경하고 있으나, 가톨릭 교회는 그를 성녀나 복녀로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줄리안은 가톨릭 성인 축일표에서 복녀로 소개되었으며,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마저리 켐프. 출처=thewisdomdaily.

 

 

예수와 친교와 대화를 나눴던 마저리 켐프

 

잉글랜드 노퍽(Norfolk)에 브런햄(Brunham) 가문 출신이었던 마저리 켐프(Margery Kempe, 1373~1438)는 글을 읽을 수 없어, 본당 신부가 신심 서적을 읽어줘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켐프는 주요 기도문 등을 암기했습니다. 20세에 결혼해 14명의 자녀를 키운 켐프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첫 아이를 낳은 후에 켐프는 8개월가량 병에 걸렸었는데, 여러 악마들과 사탄들이 자신의 신앙과 가족, 친구들을 제거하라고 유혹하는 환영을 경험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켐프는 예수와 마리아, 하느님의 방문을 받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확언했습니다. 특히 켐프는 환시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자신을 안심시켰다고 언급했습니다. 켐프는 교회의 승인 없이 자신의 체험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따라서 켐프는 여러 차례 이단 소송을 당했으나 자신의 생애 동안에 한 번도 이단 판결을 받지 않았습니다.

 

1420년대 켐프는 구술로 자신의 자서전인 「마저리 켐프의 책」(The Book of Margery Kempe)을 발간했습니다. 이 작품은 중세에 영어로 저술된 첫 번째 자서전이었습니다. 자서전에서 켐프는 1413년쯤 노리치 은수처에서 은수생활을 하던 줄리안을 방문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줄리안과 함께 며칠 머물던 켐프는 자신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신비체험에 대해 줄리안이 인정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켐프는 줄리안이 자신이 받은 계시와 여러 가지 은총을 인정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켐프의 작품은 오랫동안 유실되었다가 최근에서야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방 정교회에 속했던 켐프는 오늘날 성공회에서 공경을 받을 뿐이지, 서방 가톨릭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서방 교회는 켐프의 자서전을 통해 노리치의 줄리안에 대한 몇몇 정보를 엿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켐프를 제한적으로 연구할 뿐이었습니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이나 수도생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중세 여성 영성가들은 이성을 바탕으로 사변적인 영성신학을 전개하기보다는 감성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따라서 여성 영성가들의 영성 생활은 자칫 이단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위험성이 항상 뒤따랐으나, 예수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묵상함으로써 다른 많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유럽 대륙에서뿐 아니라, 잉글랜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면서 다음 세기에 나타날 새로운 영성 생활의 분위기를 준비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3월 4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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