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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알프레드 델프 신부 (2) 쇠사슬 묶인 손으로 거룩한 미사 봉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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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08 ㅣ No.1142

[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알프레드 델프 신부 (2) 쇠사슬 묶인 손으로 거룩한 미사 봉헌하다

 

 

알프레드 델프 신부.

 

 

알프레드 델프 신부는 1943년 「인간과 역사(Alsatia-Verlag, Kolmar)」라는 80쪽의 소책자를 보겐하우젠의 친구들을 위해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모든 인간에게 있어 가장 어두운 질문을 다룬다. “검은 돛을 단 배들이, 해적선들이, 생명을 마음대로 유린하는 배들이 자기의 바다에서 항해한다. 그들의 돛은 적절한 바람으로 부풀어올라 있고, 그들이 다닐 공간은 충분하다. 그들은 고요하고 안전하게 이 불의에서 다른 불의로 항해한다.…” 

 

당시 이 글을 읽은 모든 이는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았다. 

 

델프 신부는 이 책에서 도대체 왜 악이 역사 안에서 그렇게 열매를 많이 거두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고 있다. 그것은 “역사를 지배하는 악의 힘이 더 강력한 것도, 악이 역사에서 더 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선이 풍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이 전통을 단지 보수적인 몽매와 관습으로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선이 삶에 대한 시험의 극복을 삶의 한복판에서가 아니라 그 주변에서 행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넓은 시야와 큰 용기 그리고 위대한 결단의 시험대에 섰다. 그는 헬무트 몰트케 백작(Helmuth Graf Moltke)과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히틀러 패망 후 독일과 유럽의 정세를 걱정하면서 하느님의 법과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 비밀 모임을 만들고 여기에 참여한 것이다. 

 

사실 그의 관구장이었던 아우구스틴 뢰쉬 신부의 소개로 ‘크라이스아우 크라이스’라는 클럽을 알게 된 델프 신부는 가톨릭 사회이론가로 참여하게 됐는데 시대를 비판하는 사람에서 시대의 파괴자들에 맞서 싸우며 시대를 건설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게 됐다. 

 

그에게 주어진 투쟁의 장이란 우리가 서 있는 현재다. “도망, 이민 혹은 반발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 고유의 실재와 모순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오로지 성취하고 완성하며 구원하려는 의지여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참 실재는 육화의 신비와 연관돼야 한다.”(유고집 「그리스도와 현대」 I권 중에서)

 

따라서 그에게 투쟁은 그리스도인들의 언어로 말하면 하느님을 위한 신실한 증거다. 

 

1944년 1월 그라프 몰트케(Graf Moltke)가 그리고 그해 7월 델프 신부가 체포됐다. 그들은 나치의 붕괴 가능성을 예상해 가능한 해결책을 마련하고 그리스도교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독일 건설을 계획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델프 신부는 그해 7월 28일 뮌헨의 보겐아우젠 게오르그 성당에서 오전 미사를 마치고 신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사제관으로 오는 길에 사복 차림의 게슈타포들에게 체포돼 곧바로 베를린으로 압송된다. 델프는 관구장에게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최종 서원식이 있을 거라는 소식을 받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피정을 떠나려는 참이었다. 

 

델프 신부는 체포 순간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때가 때인 만큼 그가 어디로 끌려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베를린에 살며 델프 신부를 돕던 마리안느는 용감하고 끈질긴 노력끝에 그가 게슈타포 감옥이 있는 베를린 레-르터 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리안느는 기지를 발휘해 비밀경찰대의 삼엄한 경비와 제지를 뚫고 레-르터 가를 방문해 델프 신부의 빨랫감을 가져갈 수 있는 허락을 기어코 받아냈다. 그날이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그런데 마리안느와 친구들은 델프 신부의 셔츠에서 선명한 핏자국을 보았다. 마리안느는 그날의 놀라움을 이렇게 적었다. “이(피)를 미루어 볼 때 델프 신부는 바로 얼마 전에 매를 맞았을 것이다. 소름 끼치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는 본래 뮌헨에서 그가 장엄 서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던 축일에,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들어 올려짐을 기념하면서 인간의 몸이 얼마나 신비스럽게 영광을 받을지를 희망하는 그 축일에, 그의 독방에서 피가 터지도록 맞고 있었다니….”

 

3주 후 9월 8일 성모 탄생 축일에 델프 신부는 레-르터 거리의 건물에서 테겔에 있는 감옥으로 옮겨졌다. 국민재판소의 피고인으로 테겔에 감금된 것은 비밀경찰에 의해 심문받을 때보다 훨씬 더 견딜 만했다. 고문을 자행하던 심문은 중단됐다. 간수장은 일반 법무부 소속 공무원으로 조용하고 인간적인 관료였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마리안느라 불리는 두 교우와 더욱 자유롭게 연결된 것인데, 이들은 성실하게 옷을 세탁해 가져다준 것은 물론, 성경과 성무일도서 그리고 연구할 수 있는 책들을 넣어 주고, 가끔 음식 꾸러미도 가져다 주거나 아주 작은 유리잔과 성반 등을 몰래 들여넣어 주었다. 델프 신부는 독방에서 성물이나 초, 제대포는 없지만, 쇠사슬에 묶인 손으로 거룩한 미사를 비밀리에 봉헌할 수 있었다. 

 

그는 그해 10월 초 지인들께 보낸 편지에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교수대에 가야 한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은 모든 길에 함께 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벌써 무거운 무엇이 누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게오르그(감옥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는 피눈물 어린 흐느낌으로 가끔 사로잡히기도 합니다”라고 고백했다.

 

테겔 감옥생활은 어둠과 빛, 절망과 신앙이 반복되는 시간이었다. 고독과 격리, 폭격 상황에서도 수감자들은 감방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수갑과 함께 밤낮을 지내야 하는 등 모든 것이 신경쇠약을 일으킬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심한 외로움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는 심각한 단계에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4월 8일, 김용해 신부(예수회, 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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