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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68: 15세기 (3) 활동하는 이탈리아 영성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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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01 ㅣ No.113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68) 15세기 ③ 활동하는 이탈리아 영성가들


겸손한 애덕 실천으로 ‘신비체험’에 대한 믿음을 더하다

 

 

왼쪽부터 로마나의 프란체스카, 로렌초 주스티니아니, 볼로냐의 가타리나, 제노바의 가타리나.

 

 

중세 후반에 그리스도인들은 사변적으로 과도하게 이론화 된 신비신학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기에, 환시와 황홀경이 따르는 신비체험에 전폭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때로는 건전한 영성생활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근세 초기에 신비체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방향에서 활동적인 영성생활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탈리아에서 나타났습니다.

 

 

신비체험 통해 자선 활동가로 거듭난 프란체스카

 

로마에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이었던 프란체스카(Francesca Romana, 1384~1440)는 13세에 인근 부유한 가문 출신인 교황 근위대 대장과 결혼해 40여 년 동안 여러 자녀를 두고 모범적으로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결혼 전 수녀가 되고자 생각했던 프란체스카는 거의 일생 동안 금욕생활을 실천하며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남편도 이런 아내의 모습을 존중하고 존경했습니다. 한편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중병에 걸렸던 프란체스카는 로마의 알렉시우스(Alexius, ?~417?) 성인이 나타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는 환시를 체험하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결혼 초기부터 프란체스카는 시누이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조직적으로 자선 활동을 전개했으며 특히 병원에서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1413년경 로마에 흑사병이 돌고 기근이 들었을 때에도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집을 병원으로 개조해 환자들을 보살폈습니다. 1433년 프란체스카는 베네딕투스 수도규칙서를 따르면서도 봉쇄생활을 실천하지 않고, 세상에서 활동생활을 실천하는 여성 수도 공동체인 ‘성 프란체스카 로마나의 오블라티회(Oblate di Santa Francesca Romana)’를 설립했습니다. 1436년 남편이 사망하자 프란체스카는 수도원에 입회해 수도 원장직을 수행하면서도 금욕생활을 실천했고 자선사업에도 전념했습니다. 특히 수도생활 동안 프란체스카는 종종 환시와 탈혼을 체험했으며, 치유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받아 행했습니다. 프란체스카가 실천하며 보여준 모범적인 덕행의 모습은 프란체스카의 신비체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었습니다.

 

 

영원한 지혜와의 일치와 함께 사도적인 열정을 보인 로렌초

 

여러 성인을 배출한 베네치아 귀족 가문 출신인 로렌초 주스티니아니(Lorenzo Giustiniani, 1381~1456)는 신심 깊은 어머니에게 영성생활에 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로렌초는 19세쯤 자신을 배우자로 선택하려고 부르는 ‘영원한 지혜’에 대한 환시를 체험하고 난 후에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에 입회하기로 했습니다. 로렌초는 공동생활을 실천하는 산 조르지오(San Giorgio)에 의전 수도회에 입회했으며, 사제품을 받은 1407년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어 10여 년간 봉직했고 또 다시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되어 거의 10년간 봉직했습니다. 1433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PP. IV, 1431~1447)는 로렌초를 카스텔로(Castello)의 주교로 임명했으며, 1451년에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PP. V, 1447~1455)는 그를 베네치아 초대 총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로렌초는 개인의 삶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애덕을 용맹하게 실천했으며, 사도적인 열정을 강렬하게 발휘했습니다. 로렌초는 종교적인 삶과 관계가 있는 작품과 사도적인 활동들에서 발전시킨 작품들을 저술했습니다. 특히 로렌초는 작품들을 통해 그가 신비체험에서 깨달은 영원한 지혜와 일치하는 것을 언급했으며, 사도직이란 영원한 지혜와 통교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진정한 사도란 지혜와 올바른 일치를 이루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양 떼를 돌보는 데에 열정을 가졌던 로렌초는 개인적으로도 겸손한 모습을 지니면서 성직자의 모범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가난한 수도생활 통해 신비체험한 가타리나

 

볼로냐의 상류층 가문 출신이었던 볼로냐의 가타리나(Caterina da Bologna, 1413~1463)는 페라라(Ferrara)의 후작인 니콜로 3세(Niccol III d’Este, 1383~1441)의 궁중에서 후작 부인을 모시는 시녀로 일하면서 인문 교양 교육을 받았습니다. 1426년 궁중을 떠난 가타리나가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를 따르는 베긴회 공동체에 합류했는데, 공동체 일부 구성원들은 프란치스코 규칙서를 따르자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1431년 12명의 여성들이 페라라에서 ‘주님의 몸의 클라라회’를 다시 설립했으며, 가타리나는 1456년까지 그곳에서 수련장으로 살았습니다. 가타리나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1456년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과 볼로냐 정부 관리들은 가타리나에게 볼로냐에서 새 수도원을 설립해 주길 간청했습니다. 결국 가타리나는 페라라를 떠나 볼로냐에서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주님의 몸의 클라라회’라는 같은 이름으로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원장직을 수행했습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 이후에 가타리나는 예수, 마리아, 요셉에 관한 환시를 비롯하여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 특히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것이라는 환시를 체험했습니다. 가타리나는 1438년에 초판을 작성하고 1450~1456년 증보판을 작성한 저서 「일곱 개의 영적 무기(Le sette armi spirituali)」에서 하느님과 사탄에 대한 자신의 환시를 상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은 근세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세 후기 방언으로 쓴 신비체험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신비체험 통해 회개하고 애덕을 실천한 제노바의 가타리나

 

제노바 출신이었던 제노바의 가타리나(Caterina da Genova, 1447~1510)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였던 언니의 영향으로 13세쯤 수도원에 입회하길 원했으나, 부모님의 염원으로 16세에 줄리아노 아도르노(Juliano Adorno)라는 제노바 출신 상류층 젊은이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타리나의 남편은 신앙도 없었으며 사나운 성격이었고 낭비벽이 심해서 가타리나에게 가난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10년간 결혼생활 동안에 가타리나는 우울증에 빠져있거나 세상으로부터 위로를 찾으려고 하다가, 결국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지만 기도에 대한 응답은커녕 병에 걸려 침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타리나는 1473년에 고해성사를 하던 중에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끼는 신비체험을 하고 회개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카타리나는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기도 안에서도 하느님과 가까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가타리나는 비슷한 시기에 회개를 경험한 남편과 함께 제노바 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후일 프란치스코회 제3회 회원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부부는 아예 제노바에서 큰 규모인 팜마토네(Pammatone) 병원에서 애덕을 실천하는 일에 자신들을 봉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가타리나는 생의 말년 생사를 오가며 큰 고통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에서 환시를 체험했습니다. 이 시기에 가타리나는 고해 사제 마라보티(Marabotti) 신부에게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이미 자신이 ‘내적 영감’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에 삶을 온전히 바쳤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타리나의 가르침이 담긴 작품 「영적 대화(Dialogo Spirituale)」와 「지옥론(Trattato del Purgatorio)」 등은 후대에 다른 많은 영성 지도자들에게 영적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그리스도인 모두 자신의 신비체험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를 성실하게 실천하면서 활동하는 영성생활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례들을 통해서 근세 그리스도인들은 사변적이거나 몽환적인 신비체험에 매달리지 않고 애덕을 실천하며 영적 발전을 도모하는 영성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4월 1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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