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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 교회사와 조상제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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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1-07 ㅣ No.388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 교회사와 조상제사 문제

 

 

해마다 11월 2일 ‘위령의 날’이면, 교회는 앞서 간 이들에 대한 추모의 전례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통해서 그 추모행위가 이루어져 왔다. 지난날 교회에서는 동양의 조상제사를 미신의 일종인 조상신에 대한 숭배행위로 규정했고 신자들에게 이를 금지시켰다. 반면에, 1939년 이후 오늘의 교회는 조상제사를 용인한다. 우리 교회사의 이러한 전개 과정을 염두에 두면서, 박해시대 조상제사 문제를 생각해 보겠다.

 

 

조상제사에 대한 이해

 

조상제사 문제는 원래 중국 교회에서 불거진 문제였다. 중국에 파견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년)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현지의 관습을 존중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중국에 전하고자 했다. 이들은 중국의 지배적 사상을 유교로 파악하고, 그리스도교가 유교를 보완해서 더욱 완벽하게 해준다는 보유론(補儒論)을 선교신학으로 제시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중국의 제천의식(祭天儀式), 공자숭배, 조상숭배와 같은 관행을 인정했다.

 

그러나 1632년 이후 중국에 도착한 설교자회(도미니코회),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파리 외방 전교회 등 선교단체들은 예수회의 선교신학에 대한 재검토를 하고, 조상숭배 등을 교리에 어긋나는 이단적 행위라고 규정했다. 이들의 반론에 따라 중국에서는 신학적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로마 교황청에서는 1715년의 교령을 통해서 조상제사 등 중국 전례를 금지시켰지만, 예수회가 반론을 제기하자 제사를 다시 허용했다. 그러나 도미니코회 등의 재반론 결과, 교황청은 1742년에 새로운 회칙을 반포하여 조상제사를 미신으로 규정하며,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전개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세워진 1784년 당시 교회는 조상제사를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를 세운 이들은 마테오 리치 등이 저술한 서학서적을 통해서 천주교 신앙에 접근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조상제사 문제 등으로 갈등할 까닭이 없었다. 우리나라 교회를 일군 당대의 양반 지식인 출신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도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조상에 대한 효도를 실천할 수 있다는 데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사실, 조선후기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의 관행은 조상과 부모에 대한 효행을 중시하던 우리의 전통문화와 사상과 직결되어 있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효행 · 효도의 관념은 원래 불교와 샤머니즘의 전통에서도 함께 존중해 왔던 정신적 가치였다. 유학을 지도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조상제사는 바로 유교적 형식을 통해서 구현되었지만, 거기에는 효를 중시하던 우리 전통문화적 관념이 내포되어 있었다. 조상제사는 당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던 효심의 자연스런 표현으로까지 이해되고 있었다.

 

또한 조선왕조에서 제사문제는 단순한 관념상의 문제였다기보다는 사회적 의미를 갖는 행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맏아들의 제사상속권이 강화되고 양반사족들이 본격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를 하게 된 시기는 17세기 이후였다. 이 사대봉사는 양반 신분층의 상징이었다.

 

양반사족들은 사대봉사를 통해서 제사에 같이 참여하는 ‘팔촌 이내의 친족’[八寸親]으로 공동체를 형성해서 변동하는 사회에 대처해 가고 있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양반가문에게 사회적 결속과 존립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조상제사는 우리 사회의 주요한 정신적 가치였고 사회적 관행이었다.

 

 

제사 금지에 따른 박해

 

우리나라 천주교회를 이끌던 이들은 1789년경 최신판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던 과정에서 천주교에서는 조상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을 읽게 되었다. 이는 자신들이 읽은 예수회 계통에서 간행한 책들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이에 교회 지도자들은 베이징에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윤유일(尹有一) 등을 파견하여 천주교 서적 자체 안에서 드러나는 이와 같은 상위점에 관해 문의했다.

 

당시 조선 교회의 지도자들은 조상제사가 효심의 발로이며 표현이라는 점에 거의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베이징에 파견되었던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에게 조상제사가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이와 같이 한다.”[事死如事生]는 일임을 설명했다. 그는 가능한 한 조상제사를 계속해서 드릴 수 있다는 주교의 지침을 얻고자 한 듯하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는 이미 1742년에 결정된 교황청의 지침에 따라 조상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전해진 조상제사 금지령은 양반사족 출신 신도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조상제사가 금지됨으로써 양반 가문의 신도들 중 상당수가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조상제사의 포기는 곧 조상과 부모에 대한 아름다운 효도를 포기하는 행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효행을 충성보다 소중히 여기던 양반으로서 그 명망과 특권을 버리고, 가문을 존립시키는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상제사 금지령이 조선교회에 전해지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지도적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전통 제사의 양식을 변형하여 간소화하여 지내거나 허배(虛拜)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앞서서 양반 문중의 박해가 심각하게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양반층 신도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새롭게 터득한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자신이 원래 속했던 유교문화로 재편입되었다.

 

박해시대 교회사를 보면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제사도 드리지 않는 불효막심한 존재로 규탄되고 있다. 조상제사에 대한 교회의 금지령은 교회에 대한 탄압정책을 표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당시 박해가 발생한 데에는 여러 복합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지만, 제사금지 정책은 박해의 주요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양심의 갈등을 겪으며 교회를 떠나야 했다.

 

박해시대 내내 조선정부에서는 제사를 거부하며 조상에 대한 효심을 저버린 신자들을 ‘사람 낯바닥에 짐승마음[人面獸心]을 가진 불효한 집단으로 매도했다. 이 때문에 국가에서는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양반사족의 반열에 끼워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정부는 천주교 신앙에 물든 불효한 ‘어리석은 백성들’을 바로 잡아주고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단행했다.

 

당시 교회에서 제사를 금지한 까닭은 조상신에 대한 숭배로 파악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박해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조상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받은 바가 없다. 그들은 불효자로 규탄당했고 처형되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중국 교회의 제사문제와 우리의 제사문제가 전적으로 동일한 선상에서 파악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난날 교회에서 제사를 금지시킨 데에는 복음과 문화의 상호관계에 대한 신학적 태도와도 관련된다. 유럽중심주의가 성행하던 시절,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유일한 가치를 가진 문화였고, 다른 모든 문화를 극복해 나갈 요소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에서는 복음과 문화는 서로 다른 것으로서, 복음은 모든 문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로써 우리 교회는 전통문화에 대한 재평가의 기회를 보장받게 되었다.

 

 

남은 말

 

교황청은 1939년 조상제사 문제를 스스로 다시 검토해서 동양사회에 이를 허용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한 교회의 이해도 심화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조상제사가 가진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고 이를 용인하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리고 교회는 자신이 걸어온 역사과정에서 관여하게 되었던 올바르지 않은 일들을 반성하고 사과할 만큼 성숙되어 갔다. 교회는 지난 2000년도에 일대 결단을 내려 종교개혁에 책임의 일부가 자신에게 있었음을 인정했고,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 여러 불의한 일들을 사과했다.

 

이 상황에서 조상제사 문제로 말미암은 신앙 선조들의 갈등을 우리는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한 데에는 당시 교황청의 ‘부적절한’ 결정에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지난날의 교회가 가지고 있던 조상제사 문제에 대한 편협했던 태도에 대해서도 반성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11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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