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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부 일데폰스 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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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증인] 부 일데폰스 수사 Testes fidei - 시복 추진 대상자인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6명, 연길 수도원 소속 사제 1명, 보이론 수도원 소속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연길 교구 소속 사제 6명의 약전을 소개하고 시복 추진 현황을 알려드립니다. 1906년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2년간의 청원기를 거친 후, 1907년 10월 4일 일데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1909년 10월 10일 첫서원을 발한 후 겨우 4주 만에 선교지로 파견되었다. 그가 배정받은 선교지는 당시 새 수도원 설립 준비가 한창이던 한국이었다. 11월 7일 그는 2명의 신부와 4명의 수사로 구성된 한국 진출 제1진에 속하여 서울로 파견되었다. 12월 28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수도원 부지와 함께 매입한 한옥에 목공소를 차리고 실습생들을 가르쳤고, 수도원 건축공사에 참여해 목공일을 맡았다. 그의 야무진 일솜씨는 한때 명동 성당 안에 설치되었던 강론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1915년 뮈텔 주교의 주교성성 은경축을 기념하여 그가 실습생들과 함께 만든 것이다. 1912년 11월 24일 그는 서울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발했다. 서울 백동 수도원 연대기에서 목수로, 때로는 대장장이로 등장하는 그는 유능했고 많은 일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면서 수사들이 중국 청도(靑島)에 있는 독일군 부대로 징집되었으나,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아빠스가 현지의 독일군 사령관에게 전보를 보내 그를 징집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베네딕도회에 선교가 위임되면서, 그의 활동 반경은 수도원 밖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원산 대목구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성당과 사제관, 학교를 지어야했다. 거의 모든 본당 연대기에는 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1927년 덕원에 들어선 새 수도원 건축공사에도 그의 땀방울이 스며들어 있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의란(依蘭) 지목구를 1935년 카푸친 작은 형제회 북티롤 관구로 넘길 때, 그는 1932년 대홍수로 부서진 부금(富錦) 본당을 바닥부터 지붕까지 완전히 새로 고쳐지었다. 베네딕도회가 다 부서진 성당을 넘겨주었다는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후에도 그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명령으로 의란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원들을 도와 성당과 사제관을 건축하였다. 1938년 덕원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로마의 카푸친 작은 형제회 총장으로부터 감사의 편지와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명예회원으로 이에 상응하는 이익과 특권을 수여한다는 증서를 받았다. * 자료출처 -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북한에서의 시련(분도 출판사, 1997년), 분도통사(분도출판사, 2009년) /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분도, 2009년 겨울호] 0 1,00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