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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함요섭 요셉 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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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증인] 함요섭 요셉 수사 Testes fidei - 시복 추진 대상자인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6명, 연길 수녀원 소속 사제 1명, 보이론 수도원 소속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의 약전을 소개하고 시복 추진 현황을 알려드립니다. 1908년 그는 요셉이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였고, 1910년 10월 16일 첫서원을 발했다. 첫서원을 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1911년 1월 7일 그는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어 막 기틀을 잡아가던 서울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계속하였고, 1913년 3월 23일 종신서원을 발하였다. 그는 재단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수도복과 제의 제작을 담당했으며, 수도원 재봉실에서 견습생들을 가르쳤고, 문간도 맡아 보았다. 그 다음 그는 병실 간호 책임자가 되었고, 수도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그의 솜씨를 보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 엇갈린 반응을 보이던 인근 주민들이 점차 그를 신뢰했고, 몇 몇 환자들은 요셉 수사의 자애로운 봉사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눈을 떴다. 그가 받은 치유의 은사는 서울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긴 후에 제대로 빛을 내었다. 경성 제국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장의 추천을 받아 3년 동안 내 · 외과 진료를 할 수 있는 면허를 취득한 그는, 1928년 초 당국의 허가를 받아 수도원 내에 진료소를 열었다. 후일 경성 제국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 외과과장의 협조로 서울에서 임상경험을 쌓은 요셉 수사는 김재환 플라치도(1890-1962) 수사를 조수로 삼아 수도원 인근의 가난한 이들을 치료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의 의료 활동에 대하여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멀리서도 온 환자를 포함해 일 년에 약 18,000명의 환자들이 요셉 수사를 찾아왔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세를 줌으로써 하늘의 문을 열어 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무료로 나눠주었기 때문에, 진료소 운영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무척 컸지만, 요셉 수사는 20년이 넘게 사랑의 의술을 펼쳤다. 요셉 수사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사방 2.5m×3m 크기의 좁은 감방에 갇혀 5개월 동안 혹독한 수감생활을 하였다. 역경 중에도 그가 보여준 아름다운 형제애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요셉 수사는 루페르트 클링자이스(Rupert Klingseis, 吉世東, 1890-1950) 신부가 임종할 때 찬 몸을 덥혀주기 위하여 그를 꼭 껴안고 있었다. 요셉 수사는 체포 당시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5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은 다른 수도형제들과 교화소에 계속 수감되었고, 나머지 수도형제들은 1949년 8월 자강도 전천군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교화소에 수감 중이었으나, 1950년 10월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할 무렵, 퇴각을 서두르는 북한 인민군에게 10월 3일과 4일 사이에 총살당했다. * 자료출처 -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북한에서의 시련(분도 출판사, 1997년),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분도, 2009년 가을호] 0 1,04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