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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성인의 삶에 깃든 말씀: 성녀 데레사의 아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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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5 ㅣ No.1180

[성인의 삶에 깃든 말씀] 성녀 데레사의 아가 묵상

 

 

《아가 묵상》의 기원

 

성경은 성녀 데레사의 영성을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성녀의 대표작이 바로 《아가 묵상》이라는 소품입니다. 성녀가 살던 16세기 스페인의 상황을 볼 때 여인이 성경에 접근하는 것, 그것도 교회 역사상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온 ‘아가’를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 성경을 영성적으로 해설하는 묵상서를 쓴다는 것은, 조선 시대에 여염집 아낙네가 유교의 핵심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해설하는 책을 쓰듯 엄청난 스캔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아가 묵상》을 본 성녀의 영적 지도 신부들은 이 작품이 결코 드러내 놓고 회람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즉시 불에 태워 버리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작품의 진가를 눈여겨 본 제자 수녀들이 몰래 필사본을 만들어 보존해 온 덕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적 보화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아가는 남녀의 사랑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이기에 역사상 늘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부터 오리게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 베르나르도, 십자가의 요한 등 적지 않은 영성가들이 아가에 등장하는 연인의 모습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을 읽어 내려 했습니다. 오랫동안 하느님에 대한 신비적 사랑을 체험해 온 성녀 데레사 역시 자신의 절절한 신적 사랑의 체험을 거울처럼 비춰 주는 아가에 많이 끌렸습니다.

 

성녀는 아가를 읽으면서 다른 성경보다 더 깊고 강렬하게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불타오르곤 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한 내용과 받은 은총을 언젠가 꼭 글로 표현하겠다고 벼르고 별렀습니다. 또 평소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주옥같은 아가의 구절들을 통해 제자 수녀들에게 가르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여러 동기가 발단이 되어 성녀는 1566년에 첫 번째 원고를 썼고, 이를 1572-1575년에 다시 수정 보완하여 현재 우리에게 전해진 《아가 묵상》이 완성됐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인간

 

성녀가 《아가 묵상》을 쓰면서 근본적으로 전제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 구체적으로는 강생하신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신적 혼인’의 이미지는 성녀의 작품 전체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상징이며, 이것이 본격적으로 묘사된 작품이 바로 《아가 묵상》이라 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 성녀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오, 주님의 신부란 얼마나 대단한 품위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주님이시요 임금이신 분을 기쁘게 해 드리도록 온 힘을 다 쏟게 하기에 맞갖은 품위입니다”(《아가 묵상》 2,19).

 

이러한 맥락에서 성녀는 신부 중에 최고의 신부로 성모님을 꼽았습니다. 성모님이야말로 자기 전 존재를 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나의 여왕이시여, 아가에서 말하는 바에 따라 하느님과 신부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당신을 통해 얼마나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른답니다”(《아가 묵상》 6,8).

 

 

주해서의 틀을 빌린 영성 서적

 

《아가 묵상》은 단순한 성경 해설서나 주해서가 아닙니다. 주해서의 형식을 빌려 아가 초반의 몇몇 구절을 설명하지만, 사실 그 구절들을 실마리 삼아 영성 생활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다룹니다. 성녀가 작품 전반부에서 다룬 주제는 인간의 영혼이 누리는 ‘평화’에 관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녀는 참된 하느님 체험에서 유래하는 진정한 평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미지근한 영혼들이 맛들이는 잘못된 평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주제를 풀어 갑니다.

 

성녀에 따르면, 거짓 평화에 맛 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습관적 잘못과 죄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습니다. 성녀는 악마가 이런 허황된 평화를 영혼 안에 집어넣는다고 보았습니다. 또 이러한 전망에서 세상과 육신이 제공하는 평화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세상은 사라져 없어지고 말 헛된 부와 명예를 취하도록 인간을 꾀면서 아첨하고, 육신은 사치와 무질서한 쾌락을 추구하는 가운데 영혼 안에 잘못된 평화를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평화를 선사하는 주님과의 입맞춤

 

성녀 데레사는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아가 1,2)이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하느님의 입맞춤’이야말로 영혼에게 참된 평화를 선사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해 무엇보다 ‘일대결심(一大決心)’을 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길에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길에 매진하는 영혼은 대죄를 비롯해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잘못된 습관과 불완전한 행위까지 피해야 하며, 매사에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않으려는 원의를 적극적으로 키워 가야 합니다. 나아가 일상에서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분께 찬미를 드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녀는 진정한 평화란 육신의 욕망에 바탕을 둔 이기주의와 세상의 매력을 거슬러 싸우는 데 있다고 하면서, 하느님께서 선사해 주시는 입맞춤인 참된 평화를 갈망하도록 초대하는 가운데 이 주제를 매듭지었습니다.

 

 

고요의 기도와 합일의 기도

 

성녀가 《아가 묵상》의 후반부에서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다룬 주제는 ‘고요의 기도’와 ‘합일의 기도’입니다. 두 기도는 이미 《자서전》과 《완덕의 길》에서 ‘기도’에 대해 광범위하게 설명하는 가운데 소개한 신비로운 기도입니다. 성녀는 두 기도의 본질을 다루면서, 그 기도가 어떤 틀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의 영혼 안에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섬세하게 짚어 주었습니다.

 

성녀는 그 효과 가운데 특히 영혼 안에 잦아드는 참된 내적 기쁨, 그리고 주님과 인류를 위해 고통받고자 하는 원의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한 인격의 영적 성숙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관상과 활동의 종합 속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얻게 되는 영적 힘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이는 곧 참된 완덕이 관상과 활동의 조화에 있다는 뜻입니다.

 

* 윤주현 신부는 로마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스페인의 아빌라 신비신학 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대구 가르멜 수도원 원장,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과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9월호(통권 462호), 윤주현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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