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76: 16세기 (5) 이탈리아 신비체험가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28 ㅣ No.116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6) 16세기 ⑤ 이탈리아 신비체험가들


그리스도 수난 묵상하며 교회 쇄신 위해 노력

 

 

16세기에 스페인 영성이 온 세상으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탔던 것에 비교한다면 보잘것없지만, 동시대에 이탈리아에서도 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영성가들이 피렌체(Firenze)에서 나타났습니다.

 

필립보 네리.

 

 

오라토리오회 설립자 필립보 네리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인 필립보 네리(Filippo Neri, 1515~1595)는 피렌체의 도미니코회 산 마르코(San Marco)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18세에 산 제르마노(San Germano)의 부유한 상인인 삼촌의 사업을 도우러 갔지만 베네딕도회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을 방문해 가난한 수도생활을 목격하고 ‘부자 청년’ 비유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회심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1533년 그곳을 떠나 로마로 갔습니다.

 

로마에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지도를 받으며 3년간 신학을 공부한 필립보는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 도시의 매춘부를 돌보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필립보는 1538년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나서며 로마 시내 곳곳에서 사람들과 대화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직시하고 고민할 수 있게 이끌었습니다. 결국 필립보는 ‘로마의 사도’로 불리게 됐습니다. 특히 필립보는 1548년 자신의 고해 신부였던 페르시아노 로사(Persiano Rossa)와 함께 ‘삼위일체 형제회(Santissima Trinit de’ Pellegrini e de’ Convalescenti)’를 설립해 ‘성년(Jubilee)’에 로마를 방문하는 순례자들과 회복기에 있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형제회 회원들은 산 살바토레(San Salvatore) 성당에 모여 기도했는데, 로마에서 처음으로 성체 현시 중에 ‘40시간 기도(Quarantore)’ 신심을 실천했습니다.

 

1551년 사제품을 받은 필립보는 동료들과 함께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San Girolamo della Carit) 병원에 자리를 잡고 고해 사제로 명성을 높였습니다. 이즈음 필립보는 신자들과 함께 소성당(oratorio)에 모여 기도하며 성가를 불렀고,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 순교록을 읽고 토론했습니다. 이 모임은 1564년 사제들의 공동체인 오라토리오회(Confederazione dell’Oratorio)로 발전했고 1575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ius PP. XIII, 재임 1572~1585)가 공식 승인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수도 서약을 하지 않지만 사랑의 유대로 함께 모여서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려는 지향으로 기도하고 강론하며 고해성사를 베풀었습니다. 특히 전례 거행을 강조한 오라토리오회는 음악을 통해 전례에 봉사했습니다. 필립보는 신비체험을 경험했으며, 기적과 치유의 은사도 받았습니다. 필립보는 사제가 쇄신되면 교회가 쇄신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활동함으로써 로마를 쇄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리치의 가타리나.

 

 

그리스도의 수난 묵상하고 성흔 얻은 신비체험가, 가타리나

 

역시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인 리치의 가타리나(Caterina de’ Ricci, 1522~1590)는 6~7세쯤 숙모가 원장으로 있던 몬티첼리(Monticelli) 베네딕토회 수녀원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부터 카타리나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신심에 평생 봉헌할 마음을 키워나갔습니다. 이후 가타리나는 프라토(Prato)의 도미니코회 제3회 봉쇄 공동체인 성 빈첸조(St. Vincenzo) 수녀원에 입회해 14세 때 수도복을 입었습니다.

 

수련기 시절에 가타리나는 일상생활에서 황홀경을 경험했는데, 동료들은 처음에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차츰 그의 신비체험을 알게 되었습니다. 20세가 되던 해 성주간에 가타리나는 또다시 탈혼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후 12년 동안 성주간에 같은 신비체험을 반복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느꼈습니다. 또 가타리나는 기적적으로 아기 옷에 쌓인 아기 예수를 감싸 안기도 하고, 성인 예수와 신비적인 결혼을 하는 환시를 체험했습니다. 과도한 금욕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수난을 너무 진지하게 묵상한 나머지 몸에서 채찍 자국이나 피나 나타나기도 했으며, 성흔도 받았습니다.

 

30세에 수녀원 원장이 된 가타리나는 행정가이자 관리자로서의 능력도 한껏 발휘하면서, 교회 안팎의 지도자들에게 다양한 주제에 대해 조언을 했습니다. 가타리나는 교회 쇄신을 위해서도 열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성경을 토대로 그리스도 수난 찬미가를 작곡해 전례에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파지의 마리아 막달레나.

 

 

성령의 은사를 받은 신비체험가, 막달레나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인 파지의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ddalena de’ Pazzi, 1566~1607)는 어려서부터 기도와 참회에 매료되었습니다. 막달레나는 9세에 그리스도 수난을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를 설명한 책을 보며 가족 담당 신부에게 묵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막달레나는 10세에 특별 사면을 받고 첫영성체를 했으며, 얼마 후에 동정 서약을 했습니다. 막달레나는 12세에 처음으로 황홀경을 체험한 후에 계속해서 다양한 형태의 신비체험을 했습니다. 막달레나는 14세에 말타 수도회의 수녀원 학교에서 수학했고, 얼마 후 피렌체 가르멜회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수녀원에 입회했습니다.

 

1583년 수련자가 돼 수도복을 착의한 후에 중병을 앓은 막달레나는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막달레나가 죽어 간다고 판단한 장상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수도 서약을 하는 예식을 허락했는데, 이때에 막달레나는 약 2시간 동안 황홀경을 체험했습니다. 이후에도 막달레나는 40일 동안 매번 영성체 후에 신비체험을 했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경험하는 무미건조한 사막 체험도 겪었습니다. 따라서 막달레나의 고해 사제는 그에게 동료들을 위해 자신의 신비체험을 책으로 집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한편 막달레나는 예언의 은사와 치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탈혼 상태에서 무기력증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일상생활 업무를 지장 없이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막달레나는 수련장과 부원장을 역임했고, 교회의 쇄신과 세상의 회개를 강렬하게 염원했습니다.

 

16세기에 서방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가들의 출현을 목격하며 그들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는지, 교회를 걱정하는 영성가들은 교회가 쇄신되어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27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86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