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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안세명 아르눌프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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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증인] 안세명 아르눌프 신부 Testes fidei - 시복 추진 대상자인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6명, 연길 수녀원 소속 사제 1명, 보이론 수도원 소속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신앙의 증인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의 약전을 소개하고 시복 추진 현황을 알려드립니다. 동양 언어에 능통했던 아르눌프 신부는 1938년에 50쪽 분량의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라는 교양서적을 저술하여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 1만 부를 간행하였다. 그의 가장 뛰어난 학문적 업적은 신약성경의 서간편과 묵시록을 우리말로 번역해낸 일이다. 성경의 우리말 번역 사업은 1935년에 열린 전선주교회의(全鮮主敎會議)의 결의에 따라 덕원 수도원에 일임되어 있었다. 아르눌프 신부는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로부터 성서 번역을 의뢰받고, 그 당시까지 번역되지 않았던 신약성경의 서간편과 요한 묵시록을 우선 번역하기로 하였다. 성경 번역은 불가타(라틴어) 성경 원본을 참고하면서 그리스어 원문을 따랐다. 아르눌프 신부는 덕원 수도원 원장인 홍태화 루치오(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신부와 원산 대목구 소속 최병권 마티아(崔炳權, 1908-1949) 신부 그리고 평신도 김용학(金龍學)씨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번역작업을 진행하였다. 4년 동안의 각고의 노력 끝에 그가 번역해낸 신약성경의 서간편과 묵시록은 1941년 3월 25일 『신약성서(新約聖書) 서간(書簡) · 묵시편(默示篇)』이라는 제목으로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 아르눌프 신부 덕분에 조선 천주교회는 비로소 완전한 우리말 신약성경을 갖게 되었다. 1949년 5월 9일 아르눌프 신부는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홍태화 루치오 원장신부, 길세동 루페르트(Rupert Klingseiz, 吉世東, 1890-1950)신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었다. 같은 해 8월 5일 독일인 선교사들이 자강도(慈江道) 전천(前川)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이때 그는 평양 인민 교화소에 남게 된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로부터 모든 수도 가족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옥사덕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아르눌프 신부는 감시원들로부터 많은 욕설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같이 수용된 수도가족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성경과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내용을 들어 강론하였다. 1951년 겨울부터 숯 굽는 일을 하였지만, 이듬해 파종기(播種期)에 들어서면서 심장과 신장이 급격히 나빠져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또한 화농성 기관지염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고 있었다. 몸도 많이 붓고 발도 부어서 서지도 걷지도 못할 상태가 되자, 감시원들은 아르눌프 신부를 거름더미 위에 앉혀 거름을 부수는 일을 시켰다. 결국 그는 기력을 완전히 잃고 며칠 동안 앓다가 1952년 6월 28일 사망하여 옥사덕 수용소에 묻혔다. * 자료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 사진제공 - 역사자료실 [분도, 2008년 가을호] 0 922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