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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6) 어렵사리 포교 허락 받아 수백명에게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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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9 ㅣ No.1204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6) 어렵사리 포교 허락 받아 수백명에게 세례

 

 

히라도성당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상.

 

 

1550년 8월 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히젠의 다이묘 마쓰라 다카노부의 환대를 받았다. 일행 중 후안 페르난데스 수사는 이미 일본어에 익숙해져 일본어로 번역한 교리서를 읽을 수 있었다. 두 달 동안 100명에게 세례를 줬다. 하비에르는 일본 천황을 만나기 위해 토레스 신부에게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고 페르난데스 수사와 베르나르도를 데리고 서둘러 미야코를 향해 떠났다.

 

 

거리에서 설교하고 교리서도 낭독

 

야마구치 동부의 스오는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가 통치하고 있었다. 1550년 11월 초 하비에르 일행은 다이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스오에서 선교했다. 거리에서 하루에 두 번씩 설교하고 교리서를 일본어로 읽었다. 많은 사람이 와서 설교를 들었고 호기심을 보인 귀족들은 하비에르 일행을 집으로 초대해 대화했다. 그러나 거리를 지날 때면 아이들이 따라오며 “이 사람들이 우리가 첩을 가지면 안 된다고 설교한 사람들이야”라며 빈정거리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지, 왜 일본에 왔는지” 묻곤 했다. 그러면 하비에르 일행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호기심과 비교하면 신자가 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비에르의 가르침 중에 ‘남색은 죄’라는 내용이 오우치 요시타카의 귀에 들어갔다. 오우치 요시타카는 하비에르 일행이 전하는 서양 문화에 관심이 많았지만, 자신의 남색이 죄라고 말하는 데에는 노여워했다. 12월 7일 하비에르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이와쿠니부터 바닷길로 여정을 바꾸어 사카이에 상륙했다.

 

사카이는 국제무역항이었다. 도시는 크고 풍요로웠다. 하비에르 일행은 사카이의 거상 히비아 료케이의 환대를 받았다. 료케이의 도움으로 1551년 1월 13일 미야코에 도착했다. 히라도를 떠나 걸어온 지 두 달 만이었다. 걷는 동안 다이묘들 간의 전쟁으로 곳곳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미야코는 추웠다. 료케이가 소개해준 코니시 류우사의 환대를 받으며 미야코에 11일간 머물렀다. 천황과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면담을 청원했다. 선교 허락을 받기 위해 인도의 포르투갈 총독 가르시아 데 사의 편지와 프레이 주앙 데 알부케아키 주교의 편지를 준비하고 기다렸으나 고쇼의 신하들은 그들을 궁으로 들이지 않았다. 천황에게 바치는 헌상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쇼나 미야코 거리는 황폐했다. 미야코는 전쟁으로 경내 18만 가호의 절반 가까이가 무너지고 불탔다. 이즈음 하비에르는 당시 센코구 시대의 일본에서 천황이나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이끄는 무로마치 막부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방에서는 해외 교역이 늘어남에 따라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상업 도시들이 생겨났다. 농업과 소규모 제조업의 발달도 한몫했다. 이에 지방 실세인 다이묘들이 자치권을 주장하며 중앙에 반기를 들고일어난 지 오래되었다.

 

 

값비싼 선물을 준비 

 

미야코를 나온 즉시 하비에르는 히라도로 향했다. 1551년 3월 히라도에 도착했다. 두고 왔던 진상품을 다시 챙겼다. 하비에르는 일본 귀족들의 체면 문화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받은 냉대가 초라한 겉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한 하비에르는 이번에는 자신의 낡은 수단 대신 다이묘의 관심을 끌만한 화려한 옷을 입고 일행에게도 좋은 옷을 입혔다. 일본 천황에게 봉정하려고 준비했던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과 고아 주교의 친서 외에 망원경, 탁상시계, 유리 주전자, 거울, 안경, 서적, 그림, 소총 등 값비싼 선물을 준비했다. 4월 하순 다시 스오의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를 찾아갔다. 

 

하비에르와 후안 페르난데스 수사는 잘 차려입고 여러 하인을 대동해 행렬을 지어 위엄있게 입성했다. 하비에르 일행의 화려한 행렬에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는 그들을 지체 높은 이들이라고 생각하고 환대했다. 하비에르는 요시타카에게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과 고아 주교의 친서 그리고 우애의 표시로 준비한 진상품을 선물했다. 요시타카는 기쁘게 받았고 답례로 금과 은을 하비에르에게 주려 했으나 하비에르는 거절했다. 이에 요시타카는 하비에르가 포교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백성들이 원하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한다는 방을 저잣거리에 붙이도록 했다. 게다가 다이도우지라는 폐사를 내주어 성당으로 사용하게 했다.

 

 

일본 최초의 성당

 

다이도우지는 일본 최초의 성당이 됐다.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의 허락과 지지를 받은 하비에르 일행은 여섯 달 동안 그곳에서 수백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중에 하비에르 일행의 설교를 귀 기울여 듣던 맹인 비와 법사가 있었다. 그는 하비에르의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회심하고 로렌죠 료사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비에르를 따라다니며 일행의 선교를 도왔다. 하비에르는 마테우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일본인 청년을 눈여겨보았다. 마테우스는 겸손하고 신심이 깊었다. 예수회에 입회시킬 생각을 했다.

 

많은 귀족이 세례를 받았고 하비에르와 친분을 쌓았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늘어나는 만큼 불교 승려들은 불편했다. 스오에는 800여 개의 사찰이 있었다. 한 사찰에는 서른 명 내외의 승려들이 있었다. 승려들은 세례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을 찾아가 “이제껏 지켜온 불법을 내팽개치고 하느님의 법을 받아들이느냐”고 비난했다. 새 신자들은 “이전에 불법에 대해 승려들에게 질문했을 때 만족할 만한 답을 못 얻었는데 새로 받아들인 하느님의 법에서 만족할 만한 답을 얻었다”고 항변했다. 불법의 가르침에는 ‘세상의 창조’와 해와 달과 별, 하늘, 땅, 바다 등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점차 분개하기 시작했고, 예수회원들의 선교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6월 10일, 김태진 신부(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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