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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5) 일본 땅을 밟은 첫 번째 사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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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6 ㅣ No.1199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5) 일본 땅을 밟은 첫 번째 사제가 되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온노스쵸 상륙 기념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8년 1월 20일 로마의 예수회원들, 이냐시오, 포르투갈 왕에게 각각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말루쿠 제도의 선교 상황과 야지로를 만난 이야기, 일본 상황과 일본 선교에 대한 계획을 길게 서술한 편지였다. 로마에 하비에르의 편지가 도착하면 예수회 공동체 식사 독서시간에 다른 책들 대신 하비에르의 편지가 낭독되곤 했다. 로마의 회원들은 하비에르의 편지로 포르투갈령 인도를 체험했고, 하비에르와 함께 일본을 상상했다.

 

 

일본인 최초의 신자 야지로와 선교 준비

 

하비에르는 야지로와 더불어 일본 선교를 준비했다. 그는 1548년 3월 야지로에게 ‘파울로 데 산타페’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줬다. 야지로는 일본인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됐다. 하비에르는 그에게 일본어를 배웠다. 야지로는 포르투갈 말을 더 배웠고 고아의 성 바울로 학교에서 교리 수업을 받았다. 

 

하비에르는 코치로 가고 싶어 했지만, 총독의 명으로 겨울 동안 고아에 머물러야 했다. 고아에 1년간 머물면서 편지로 이제 수십 명으로 늘어난 동료 예수회원들을 통해 코모린과 믈라카 제도의 선교 사목 활동을 조직화했다. 7월과 8월에 걸쳐 ‘기도와 영혼 구제의 자세’에 대한 글을 쓰고 ‘이교도 개종을 위한 기도문’도 썼다. 

 

하비에르는 10월쯤 코치로 돌아왔다. 다음 해 1월 12일에 한 통, 14일에 두 통의 편지를 이냐시오에게 보냈다. 인도 사목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인도인들의 미개함 그로 인한 개종의 어려움, 기후, 음식, 언어 장벽, 건강과 생명의 위협을 열거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에서의 선교에 대한 희망을 서술했다.

 

1549년 4월 15일 하비에르는 일행과 함께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일본으로 출항했다. 일행은 포르투갈인 세 명과 일본인 세 명이었다. 포르투갈인은 예수회원으로 하비에르와 코스메 데 토레스 신부, 후안 페르난데스 수사였고, 일본인은 야지로와 그의 동생 요한네스, 야지로의 부하 안토니오였다. 이들은 모두 고아 산타페 학교에서 포르투갈 말을 배웠고 세례를 받은 후 30일간 영신수련을 받았다. 이들 모두는 고향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찼다.

 

인도 고아를 출발한 하비에르 일행은 1549년 5월 31일 믈라카에 도착했다. 해적으로 알려진 중국 상인 아반이 그들을 융기선(중국 범선)에 태워 일본으로 데려다 주기로 했다. 1549년 6월 24일 드디어 출항했다. 바람이 불지 않은 탓도 있지만, 출항 후 아반과 선인들은 쓸데없이 주변 섬들을 배회했고 일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주사위를 던져 점을 쳤다. 배가 중국 쪽을 향해 가다 코친차이나(현 인도차이나반도) 근처에서 거센 풍랑을 만났다. 하비에르의 중국인 협조자 마누엘이 뚜껑을 열어놓은 배 밑창으로 빠졌다가 가까스로 들어 올려졌다. 그러나 잠시 후 다른 풍랑에 선장의 딸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드디어 일본 남단 작은 마을에 상륙

 

1549년 7월 27일 일본 남단 최남단 사쓰마 연안에 도착했으나 어떤 항구도 하비에르 일행의 배를 받지 않았다. 일본은 포르투갈령이 아니었다. 사쓰마반도의 보우노츠 앞에서 뭍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8월 15일에야 하비에르 일행은 포르투갈 왕의 사신 자격으로 환대를 받으며 뭍에 오를 수 있었다. 기온노스쵸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동쪽으로 바다를 보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로 이나가와 강이 바다로 빠져나갔다. 1543년 다네가 섬(지금의 가고시마현 오스미 제도)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처음 일본에 온 이래로 6년 만이었다. 

 

하비에르는 일본 땅을 디딘 첫 번째 천주교 사제였다. 하비에르는 야지로의 집에 머물렀다. 하비에르는 일본어를 아직 잘하지 못했다. 유럽인에게 일본어는 쉽지 않은 언어였다. 하지만 열심히 일본어를 배웠고 교리를 가르치는 데 필수적인 내용을 야지로와 함께 일본어로 번역했다. 일본어로 번역한 교리서를 신자들에게 읽어주었다.

 

 

신자는 백 명 가까이 늘어나 

 

하비에르는 일본어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했다. 대신 인도에서 가져간 성모화, 성모자화를 일본인들에게 보여주며 그리스도교를 설명했다. 한편 모국어로 복음을 전하는 야지로는 그의 어머니, 아내, 남녀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하고 세례를 받게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신자 수는 백 명 가까이 늘어났다. 그중 하비에르는 일본인 무사 한 명을 눈여겨보았다. 그는 베르나르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충실했고 학식도 깊었다. 하비에르는 그가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데 초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549년 9월 29일 하비에르는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의 초대로 이쥬인성에 가 그에게 화승총을 선물했다. 다카히사는 자신의 영내에서 선교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영내의 불교 승려들은 하비에르 일행의 선교가 탐탁지 않았다. 하비에르는 얼마 후 후쿠쇼우지의 주지승이었던 닌지츠와 함께 종교 논쟁을 벌였다.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불교 승려들과 토속 영주 코쿠진들은 다카히사에게 “영내의 주민들이 그리스도교를 믿으면 주민들이 사찰의 땅을 빼앗고 절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교는 불교와 반대되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이들은 불교를 버릴 것”이라고 했다. 다카히사는 승려들에게 설득당했고 영내 백성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믿으면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하비에르는 일본 전반뿐 아니라 특히 교토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교토에 일본의 천왕이 있고 여러 대학이 있음을 알았다. 하비에르는 일본의 지식층과 유럽의 명문 대학들, 특히 자신의 모교인 파리 대학이 일본의 대학들과 교류하길 희망했다. 하비에르는 미야코(현재 교토)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일본 천황을 직접 만나서 그를 개종시키길 원했다. 하비에르는 전에 눈여겨보았던 무사 출신 베르나르도와 함께 1550년 8월 말에 포르투갈 상인들의 배가 드나드는 히라도로 이동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6월 3일, 김태진 신부(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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