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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77: 16세기 (6) 종교개혁주의와 프란치스코 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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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6 ㅣ No.1198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7) 16세기 ⑥ 종교개혁주의와 프란치스코 드 살


구원 예정설 맞서 “모든 그리스도인 은총 받을 수 있다” 강조

 

 

- 발렌틴 메칭거 작, ‘칼뱅교도와 논쟁하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오른쪽)’.

 

 

16세기에 출현한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주장이 인문주의자들의 주장과 유사하게 보이면서 서방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방 가톨릭 교회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종교화의(宗敎和議)와 1545~1563년 트리엔트(Trient) 공의회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후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567~1622)은 종교개혁주의자 세력과 맞서 싸우면서도 인간학적 관점에서 인간 자체에 관심을 두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를 완성했습니다.

 

 

과도한 은총 작용으로 예정설을 만든 급진적인 종교개혁주의

 

아우구스티노 엄률 수도회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테첼(Johann Tetzel, 1460~1519)이 대사(大赦)를 거래할 수 있는 듯한 인상을 주며 피상적으로 강론한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1517년 자신이 생각하는 대사의 본질과 사용에 대한 95개 논제를 공표했습니다. 교황청은 1518년부터 루터를 이단 심의했으며, 1521년 정식 파문했습니다. 마침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Karl V, 재위 1519~1556)는 자국에서 발생한 종교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으나 저항에 부딪히자, 1552년 동생인 독일 왕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재위 1531~1564)에게 종교 문제 조정권을 넘겼습니다. 결국, 페르디난트 1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를 통해 독일 내에서 가톨릭교회와 루터교가 동등한 권리를 지니며 공존한다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를 비롯하여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와 칼뱅(Jean Calvin, 1509~1564) 등의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그리고 ‘오직 은총(sola gratia)’이라는 기본 원리가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특히 칼뱅은 은총 문제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따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타락한 인간 본성은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만이 은총으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 역시 저서 「그리스도인의 자유(De Libertate Christiana)」와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에서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저서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latio)」과 「히페라스피스테스(Hyperaspistes)」에서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은총만 강조하다가 만들어낸 예정론을 반대하며 인간이 은총의 도움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해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인간에게 책임 있게 행동할 기회도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인문주의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했던 은총론을 약화해 인간의 자유의지가 은총에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자, 은총 논쟁은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스페인 도미니코회 바네즈(Dominic Baez, 1528~1604)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지지하면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하느님 섭리 안에 포함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예수회원 몰리나(Luis de Molina, 1535~1600)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작용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유의지와 은총을 동등한 입장에서 고려했습니다. 이후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은 자유의지를 제한하는 견해를 밝혔고, 몰리나주의자들은 자유의지를 더 강조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두 수도회는 스페인 종교 재판소에 상호 소송을 제기했으나, 교황 바오로 5세(Paulus PP. V, 재임 1605~1621)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유보적인 입장은 은총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이단적인 영성생활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예정설을 극복한 프란치스코 드 살

 

프랑스 동부 사부아(Savoie) 출신 프란치스코 드 살은 7세에 라로쉬(LaRoche)에서 그리고 9세에 안시(Annecy)에서 프랑스어와 문학을 공부했으며, 1578년부터 10년간 파리 클레르몽 대학(College de Clermont)에서 인문학에 비중을 두고 부차적으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또 프란치스코는 1588년 이탈리아 파도바(Padova)에서 교회법과 일반시민법을 공부하고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포세비노(Antonio Possevino, 1534~1611)에게 신학을 배우고 영적 지도를 받으며 「영신수련」에 따른 영적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프란치스코는 수덕신학자 스쿠폴리(Lorenzo Scupoli, 1530~1610)의 저서 「영적 투쟁(Combattimento Spirituale)」을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아 오랫동안 애독했습니다. 결국, 프란치스코는 인문학의 바탕에서 영성 훈련의 정신을 받아들여 실천적인 영성을 펼쳤습니다. 1602년 제네바(Geneva)교구장으로 임명된 프란치스코는 이미 개신교로 돌아선 많은 이들이 다시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저서 「신심생활 입문(L’Introduction la Vie Dvote)」에서 평신도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영성생활을 강조했습니다. “귀족과 직공, 왕족과 노복, 과부와 주부, 소녀들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신심은 각각 달라야 한다. 또 한층 이것을 개인의 능력, 일, 직무에 맞추어야 한다.”(제1부 제3장)는 것입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만 바라보며 관상생활을 하는수도자와 함께 획일적인 영성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며 삶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영적 여정을 걸어야 합니다. 또 프란치스코는 「신심생활 입문」 제2부 기도와 성사 편에서 체계적인 묵상기도 방법을 소개했는데(제2부 제1장~제11장 참조), 이는 새 신심 운동을 지지했던 영성가들의 성경 묵상 방법과 유사한 체제와 모습을 지녔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사랑에 기초를 둔 참된 신심을 강조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받아야만 애덕을 쉽게 실천하고 완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제1부 제1장 참조) 결국 그리스도인은 애덕 실천을 통해 완덕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애덕 실천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일 뿐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법으로 실천할 수 있는 덕행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때 파리에서 프란치스코는 예정설에 영향을 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가 부정적인 감각의 원죄보다 긍정적인 감각의 구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깨닫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극복했습니다. 즉. 초자연 질서에 속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자연 질서에 속한 인간 본성에 들어와도 인간 영혼을 파괴하지 않으며 인간 본성을 더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를 경건한 인문주의로 각인시킬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인 인간 이해를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인문주의를 경건하게 채색함으로써 에라스무스가 완성하지 못했던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제시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6월 3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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