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2014-0928.....연중 제26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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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4-09-28 ㅣ No.1604

연중 제26주일 (가해)

에제키엘 18,25-28       필리피 2,1-11      마태 21,28-32

2014. 9. 28. 이태원.

주제 : 하느님의 판단기준

사람에게 교육은 필요합니다. 특히 젊은이가 되기까지 어렸을 때부터 교육은 매우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록 교육이라는 것이 세상을 먼저 살았던 사람의 판단기준이나 그가 받아들인 것을 후대에 전하는 것이라는 단점(短點)이 있더라도 필요한 일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과거의 것을 전달받은 사람이 더 나은 것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그가 처한 장소와 환경에 따라 바꾸어도 좋을 일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교육의 장을 마련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무조건 후세에게 전달하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 자신부터 참되고 올바른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론은 이렇습니다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올바른 기준을 사람들이 항상 실천하면서 살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일 수는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떻게 살면 올바르게 산다고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준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의 사물이나 일을 대할 때, 공평하다거나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의 기준으로 상대비교나 절대비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교가 세상일에는 잘 적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일에도 똑같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저는 이런 경우, ‘가치비교라는 기준을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사람이 그 앞뒤의 사정을 정확히 꿸 수는 없겠지만, 오늘 말씀드리는 가치비교라는 기준을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삶에 적용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심각한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싫다고 대답했다가---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고, 작은 아들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지만---마음을 담지 않고 말한 것이기에 일하러 가지는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경우를 말하면 따라오는 곧바로 따라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두 명의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첫째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일까요? 아버지의 말씀에 일하러 가겠다고 대답하고 그 대답대로 행동으로 옮긴 아들은 왜 없느냐는 궁금증과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교육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본보기일까요? 어째서 좋은 뜻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훌륭한 아들은 찾아볼 수 없고,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한 두 아들 중에서 한명이 아버지의 뜻을 따른 사람이라고 선택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차원도 다를 수 있고, 그 심오함의 정도도 더 깊다고 하겠지만,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철학적인 표현입니다만, 유비(類比的)인 상관성을 생각하면, 사람이 올바르다고 공통으로 합의한 올바른 길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향해 대하시는 뜻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으로 살았던 사람이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이 되는 경우와, 악인으로 살았던 사람이 의인이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는 알 수 없어도, 그 두 종류의 사람에게 하느님은 판단을 달리하신다는 것이 에제키엘예언자의 선언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공평하다고 말할까요? 이러한 하느님을 정의로운 하느님이라고 말할까요? 어떻게든지 대답하는 방법이나 모양에 따라서,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되는 우리의 모양도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움직임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똑같다고 누가 자신할 것이며, 하느님은 인간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우기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느님이 되면, 과연 세상의 모든 것을 옳게 보고 옳게 판단하고 옳게 행동할까요? 그리하여 언제쯤 되면 내가 세상을 심판할 능력 있는 자로 그 모습을 드러내겠습니까?

 

본질로는 하느님이셨던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시고, 세상에 살고 있던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모든 것을 내놓으신 분이라고 바오로사도는 필리피의 교회공동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썼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러한 분임을 믿고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나는 그러한 예수님을 어떻게 본받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현주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014년의 순교자성월을 지내는 마지막 주일, 세상을 대하는 하느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그리하여 행동하고 있는지 잠시 묵상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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