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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세례명 - 신앙 공동체의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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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115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세례명

 

신앙 공동체의 끈

 

 

우리 문화는 이름자를 소중히 여기던 풍토였다. 우리나라 문화에서 양반 가문에 속하는 사람들은 호적상의 이름인 관명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곧, 그들은 성인식의 일종인 관례를 마치면 자를 받았고, 성인이 된 다음에는 여러 가지 호를 갖게 되어 많게는 한 사람이 여남은 개의 이름을 갖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박해시대 우리나라는 여성이나 양인 이하 신분 등 제대로 된 성명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세례명을 부여하는 일은 세속적 신분의 차이를 떠나 신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출발점을 다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대한 도전이었다.

 

 

본명과 속명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호랑이가 죽어서 귀한 가죽을 남기듯 사람은 훌륭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이 속담은 역설적으로 이름을 남기기가 어렵다는 말로도 풀어진다. 사실 이 속담이 만들어지던 때는 남길 이름마저 없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실제로 세상에 살았다 하더라도, 이름이 없다면 아무도 그를 기억하거나 말할 수 없다. 그의 존재도 인정받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이름은 단순한 호칭의 수단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이름을 가짐으로써 의미 있는 개체요 존재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름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이름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람들이 누구나 성과 이름을 갖게 된 때는 현대에 들어온 이후부터였다. 조선왕조 때만 하더라도 우선 천인들에게는 제대로 된 성씨나 이름이 드물었다. 그리고 여성들의 경우에는 어렸을 때 불리던 아명 이외의 이름은 없었다. 1910년 5월에 작성된 민적부를 보면 65% 정도의 사람들이 성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는 조선왕조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성명제도가 매우 부실했음을 나타내는 일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세례를 통해서 신자 공동체에 들어오게 되면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이 이름은 본향인 천국에서까지도 불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세례명을 흔히 ‘본명(本名)’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관청에 등록된 이름이나 이웃들이 불러주던 자신의 이름을 속명(俗名)이라는 말로 낮추어 평가했다. 속명은 세속에서 불리는 이름이란 말이 된다. 본명과 속명을 구분하던 그들의 태도에서 기존의 가치관이 뒤집히는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박해시대 양반 출신 신자들은 영세를 통해서 자신이 원래 사용해 왔던 이름에 더하여 세례명을 받았다. 양반층 신자들은 별호를 지어 받아왔기 때문에, 세례를 통해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는 일이 특별히 낯설지는 않았다. 반면에 당시 사회에서 이름을 가지지 못했던 여성이나 천인 출신들은 제대로 된 이름 갖기를 열망해 왔다. 이들에게 세례를 통해 ‘본명’이 주어진 것이다. 그들의 열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본명을 갖게 된 사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의미할 만큼 심각한 사건이요 기쁨이기도 했다. 때문에 새롭게 입교한 이들은 양반이나 상민을 가리지 않고 생소한 서양식 이름을 세례명으로 선택하면서도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박해시대 세례명 짓기

 

우리 교회법에는 세례를 받을 때 세례명을 짓도록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법 규정은 가톨릭교회의 오랜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초기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을 때에 특별히 세례명을 의무적으로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점차 구약성서의 인물이나 로마제국의 박해시대에 순교한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선택하여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삼는 관행이 번져갔다. 이 관행을 반영한 공의회(1311-1312년)의 비엔나 결정에 따라 세례명의 사용이 공식화되었고, 이에 따라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세례명을 부여했다. 곧, 이승훈은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다.

 

우리나라 초기교회의 신자들은 “성경직해광익” 등 한문 서학서를 통해서 성인들의 행적을 알고 있었다. 이 책에는 베드로 · 시몬 · 타데오 · 요한 · 안드레아 · 토마스 등과 같은 사도들, 스테파노 · 세례자 요한 · 요셉 · 바오로 등 성서상의 인물과 로마시대의 순교자인 실베스테르 그리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과 같은 성인들을 향한 기도와 함께 그들의 생애가 간략히 제시되어 있었다.

 

박해시대 우리나라 신자들이 어떠한 세례명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가? 이를 알아보고자 1801년의 박해를 전후해서 생존했던 신도들 가운데 세례명을 밝힐 수 있었던 사람들과 1839년과 186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하여 시성된 조선인 신도 등 119명의 세례명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름이 특별히 있었다. 박해시대 남자 세례명 가운데 가장 선호하던 이름은 베드로(23명), 요한(13명), 바오로(11명), 방지거(방제각, 프란치스코 포함 8명), 요셉(5명)으로 집계된다. 여성의 경우에는 바르바라(11명), 아가타(10명), 막달레나(8명), 마리아(7명), 데레사, 안나 등의 순서로 나타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새롭게 선택한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름을 정하는 일은 한 사람의 새로운 탄생을 뜻한다. 박해시대 신자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남성의 경우에는 사도들의 이름을 자신의 세례명으로 즐겨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여성의 경우에는 로마시대 박해에서 배출된 동정 순교자들을 세례명으로 선택하여 자신의 주보로 삼았다. 박해시대 신도들이 가지고 있던 신심이나 행동의 특성들은 그들의 세례명을 통해서도 배어나고 있었다.

 

 

남은 말

 

당시 조선왕조의 정부당국에서는 별도의 세례명으로 서로를 부르던 신도들의 관행을 자신의 신분 노출을 막으려는 일종의 비밀스런 집단에서나 하는 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세례명을 신자들의 ‘표호’ 또는 ‘표명’으로 이해하면서도, 이를 ‘사호’ 곧 ‘사악한 이름’으로 지칭하여 공격했다. 그러나 박해시대 신도들은 세례명을 가짐으로써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세례명은 신앙 공동체의 주민등록증이었고, 그 구성원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끈이었다. 그들은 세례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존재로 태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례명은 자신과 그리스도교 전통을 굳게 결합시키는 끈이었다. 그들은 세례명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살고 있던 사회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세례명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는 박해시대 신자들에게 대단한 의미를 줄 수 있던 사건이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8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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