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2014-1109.....라떼라노성전봉헌기념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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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4-11-09 ㅣ No.1632

라떼라노 대성전 봉헌축일 [1109]

에제키엘 47,1-2.8-9.12      1코린토     요한 2,13-22

2014. 11. 9. (주일). 이태원

주제 : 내 몸은 성전으로서 어떤 가치를 갖는가?

오늘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라떼라노대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대한민국 서울의 용산구에 있는 이태원성당을 기념하는 축일도 아닌데, 우리가 오늘 전례를 통하여 기억하는 이 축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또한 이렇게 기억하는 성전이 우리나라 땅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니, 의미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더 커집니다.

 

오늘 기념하는 라떼라노 성전봉헌축일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일을 그만 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부인이 속해있던 라떼라노 가문에서, 교황님과 그 후계자들이 거주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궁전을 제공한데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가문에서 교황님이 사용할 궁전을 기증했고, 그곳을 교황님의 거주지로 정하고, 성전을 꾸미고 봉헌한 데서 시작한 날입니다.

 

사람은 사는 곳이 안정되어야 그 다음에 연결되는 다른 일들도 평안하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주(衣食住)라는 표현을 통해서 삶에 중요한 것들의 순서를 정하기도 합니다만, 때로는 입어야 할 것이나 입고 싶은 것을 덜 입으면 창피하면 되고, 입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 것이 됐든지 먹고서 영양분을 얻을 수 있으면 목숨을 유지하는 일로는 충분하겠지만, 같은 중요성은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사람이 머무는 집은 참 중요한 곳이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역대기와 열왕기성경을 읽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다윗도 하느님을 공경하는 장소인 성전(聖殿)을 먼저 지은 것이 아니라, 임금인 자기가 살던 궁전을 먼저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별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사제생활을 통해서 성전신축을 했던 저는 그 일을 깨닫는 순간 놀랐습니다. 물론 다윗이 그렇게 한 것도 하느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 그러셨다는 사실을 안 순간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던 일도 있습니다.

 

성전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겠습니까? 좁은 의미는 여러분이 지금 들어와 있는 이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알아듣는다면, 보편적인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들 삶에 다가오는 의미는 크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이 공간을 벗어나서 말 그대로 세상의 삶으로 돌아가면 그 보편적인 의미의 성전은 삶에서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라떼라노궁전이 성전으로 바뀌어 교회공동체에 자리 잡은 것을 기억하는 날, 우리가 생각해야 할 내용은 보편적인 의미보다는 우리들 각자가 성전이 될 수도 있다는 특수한 의미의 성전을 생각하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할 성전으로서 여러분의 몸을 어떤 자세로 대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정답은 따로 없습니다. 내가 내 몸을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자세에 따라서 하느님께서 세상에 현존하신다는 상징인 이 성전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진다는 원칙에 가까운 소리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성전, 예수님께서 정화사건을 벌인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은 역사상으로 보면, 같은 장소에 헤롯대왕이 지은 세 번째 성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에 대한 올바른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첫 번째 성전, 느헤미야 총독과 즈루빠벨 대사제가 지은 유배후의 성전에 이어서 다시 세워진 세 번째 성전에 대한 사람들의 자세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편의를 먼저 생각하고,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도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것이었다면,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아서 다시 허물어지고 파괴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정해진 순서였을 것입니다.

 

성전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어떤 것인지 강조하는 예수님에게, 일부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마음과 생각을 올바르게 돌이킬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느님께 봉헌한 행위들만 더 크게 보고, 그거라도 바치는 자기들의 정성을 하느님은 감지덕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행동을 합니다. 본질과 결말이 바뀐 것이고, 하느님은 그저 인간이 하는 일에 아무런 뜻도 밝히지 말고 주는대로 받으면 충분하다고 그들이 주장한 것이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사람은 많은 경우 착각 속에 삽니다. 자신이 멋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자신이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하고 살기도 합니다. 자신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자신은 나라의 기둥이니 자신은 국부(國父,=임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삽니다. 그렇게 사용하는 다양한 표현들이 자기 혼자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고려한 것이라면 참 좋을 일이지만, 그러한 자신감이 때로는 아주 큰 문제를 만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몸이 성전으로서 차지하는 기능은 무엇이겠습니까? 누가 그 사정을 정확하게 알려주겠습니까? 어떤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면 우리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지겠습니까? 정답을 원하는 순간에 대답을 듣기는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성전과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죽음의 바다인 사해(死海)의 물마저도 단물이 되게 하고, 일년 사시사철 동안 생명을 끊임없이 피어나게 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오늘 에제키엘예언서에 나오는 말씀대로 믿고 사는지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이 되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려면, 우리가 지금 삶의 뿌리를 어디에 내리고 있는지 제대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예수그리스도라는 올바른 기초, 올바른 근거를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같은 마음과 정신을 갖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거룩한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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