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2014-1102.....위령의날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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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4-11-09 ㅣ No.1627

위령의 날 [1102] - 셋째미사

지혜서 4,7-15       로마 6,3-9     마태오 25,1-13

2014. 11. 2. 이태원. 교중11시 미사.

주제 : 하느님을 아는 슬기를 발휘하기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똑똑하다거나 현명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바랄 법한 일이고, 그런 소리를 들을 때 기분도 좋고, 남이 나를 인정해준다고 생각해서 발걸음이 가벼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진정으로 이러한 소리를 듣고 남에게나 나에게나 같은 효과가 있으려면, 그 삶의 기준은 인간의 생각이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을 따라야 할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우리는 삶에서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여주고 싶어 할 선한 모습은 조금도 보지 못하고, 의도와는 달리 그 사람이 드러내는 나약하고 아쉬운 모습만 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드러내는 좋은 모습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의도와 의미를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갖는 한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웃의 어떤 사람이 나를 향해서 못되고 힘겨운 소리를 할 때, 그 소리를 견디어내는 방법에 따라, 내가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판단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하겠습니까? 내가 어떤 기도를 하면,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분의 영혼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위령의 날 셋째 미사에 나온 복음에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다섯은 어리석고 나머지 다섯은 슬기로웠다고 구별했는지,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나누어서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지는 못하지만, 이 두 무리에서 선택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부류에 들어가고 싶으시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그 말뜻을 안다고 생각할 우리는 당연히 슬기로운 처녀와 그 무리에 포함되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대답을 그렇게 한다면, 내가 바라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지금 현재,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어떤 준비를 했는지 그와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어리석은 처녀들은 어떤 실수를 했기에 현명한 처녀들의 무리에 들지 못했는지, 그걸 확인할 수 있어야 그 다음에 자동적으로 생기는 결과를 예상할 수 있고, 다음 순간에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의 눈과 몸이 향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어리석은 길로, 어리석은 방법을 동원하여 바쁘게 가는 사람을 그 발걸음에서 돌려세울 수 있는 방법이 많지는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멀리 내다보지 못하여, 남들이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삶에서 바꾸어야 할 것을 얘기해줘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알아듣는다고 하면서도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기 때문에 올바로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복음 얘기로 돌아가서,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무리에 들고 싶지도 않다고 말할 것이고, 그녀들처럼 살지도 않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말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이 따라야 하는 일입니다. 복음에 나온 표현을 그대로 말하자면, 귀찮아도 여분의 기름을 다른 그릇에 담아갖고 있어야 다음 순간에는 내가 가진 등잔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간단한 사실을 모를까요? 하지만 안다고 하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내가 올바른 준비를 미리 하지 않아서, 어려운 상황에 빠지기 된 다음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느냐고 아무리 큰소리로 물어도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할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대하는 사람이고, 그에 따라서 사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주신 축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까? 혹시나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하느님의 축복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자유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우길 사람이 있을까요? 묻는 것은 자유이지만,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그렇게 내 귀를 울리는 말에서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 것과 달리, 세상 삶의 길이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이 반드시 길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 수도 있고,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않은 의롭지 못한 사람이 오래도록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의 기준은 길거나 짧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지혜서를 통해서 들은 말씀에는 의인일수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빨리 데려가신다는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전해줍니다. 하느님은 가만히 계시고, 구약성경 지혜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지만, 이런 소리를 듣고 하느님이 가지셨을 깊은 뜻을 이해할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신앙인으로 살게 되는 대문인 세례성사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되는 순간입니다. 자격을 얻었으면, 그 자격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고, 내가 그렇게 사는 일로서 오늘 기억하는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영혼들에게 도움이 될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세상에 원하시는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잠시 생각하고, 우리가 바른 길을 따라 걸으면서 하느님의 자비가 지금 이 순간 내가 기억하는 분들에게도 실현될 수 있도록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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