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2014-1026.....연중 제30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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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4-10-25 ㅣ No.1622

  연중 제 30 주일 (가해)

탈출기 22,20-26       1데살로니카 1,5-10      마태 22,34-40

2014. 10. 26. 이태원.

주제 : 우리가 아는 하느님의 정의

사람은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말하면서, 정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격에 일치하는 일을 하는지는 따로 판단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사람은 위대하고 독특하고 특별한 일을 합니다. 그렇게 하는 위대하고 독특한 일이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결과를 남겨야한다고 이론을 말하기는 쉽지만, 어떤 행동으로 그렇게 좋은 결과를 남길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나친 욕심을 가진 탓일까요?

 

욕심을 갖거나 자기가 가진 그 욕심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사전에 나오는 욕심이라는 글자의 낱말풀이를 하는 것은 아니라 씀씀이를 보자는 것입니다.

 

욕심이라는 말은 세상에서 남보다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향하여 드러내는 것이고, 세상에서 차지한 권력이 큰 사람이 자신보다 적은 권력을 가진 사람을 향하여 마음을 드러낼 때, 그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흔히 이와는 다른 판단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혹시라도 뭔가 숨겨놓고 그 마음을 포장하는 사람인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느님은 과연 어떤 사람의 말을 듣겠다고 하시는지 그리고 하느님은 누구 편을 들겠다고 하는지 그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말씀으로 여러분은 어떤 판단을 하겠습니까? 하느님은 욕심을 가진 사람을 편드시는 분일까요? 아니면 욕심을 가진 사람에게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편드시겠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발달하고 아무리 공정하게 변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 불공평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 갖는 필연적인 한계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불공평과 불평등이 없는 세상은 하느님나라가 실현된 곳이라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서는 하느님나라를 얘기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느님나라가 돼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면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다 갖지 못하게 될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나라를 계속해서 반대할 것이고, 거부할 것이며, 하느님나라가 서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억눌러서도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방인을 억압한 일도 없고, 학대한 일도 없으며, 과부나 고아를 억누른 일이 없으므로, 하느님의 말씀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완벽하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삶이 드러내는 진실이 그러하다면 참으로 다행이지만, 그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각자의 삶을 돌아보는 방법은 좀 더 신중해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편들어주신다는 이방인이나 과부나 고아가 무슨 일을 얼마나 잘 했기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편들어주시겠다고 했는지, 오늘 탈출기의 말씀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쪽 편을 편드는 하느님을 가리켜 불공정하고 부당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내가 하는 행동은, 내 눈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눈에 이방인이나 과부나 고아를 못살게 구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지 그 모습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방인으로 살게 된 사람이나 과부나 고아는 자기가 원해서 그 상황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내 삶에 남긴 영향 때문에 그 상황에 빠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황에 빠진 사람을 향해 연민의 정을 갖는 것은 고사하고(==부사/(주로 ’·‘기는의 뒤에 쓰여) 더 말할 나위도 없이. 그만두고. 커녕.) 그들을 향해서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 된다는 탈출기의 말씀은 한편으로 무섭기까지 합니다.

 

율법교사 한 사람이 물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는 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구약율법의 정신을 해석한 사랑의 계명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첫째 계명과 둘째계명을 갈라서 말씀하셨지만, 차이가 있고 차등을 두기 위해서 구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한 가지만 선호하셨다면,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은 질문에 굳이 첫째와 둘째를 나누어서 말씀하실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율법학자의 질문에 일치하는 예수님의 대답은 두 번째 계명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하느냐고 질문할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 대답을 그분들에게 알려드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안다고 하면서 그 길을 따라 걷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과 같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올바른 길을 알려줘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정의가 세상에 펼쳐지기를 원하는 분이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미리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지는 일에 얼마나 협조하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예상하는 대로 하느님이 움직이시지 않는다면, 그러한 하느님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많은 질문을 하고 대답을 기다릴 수도 있지만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강요할 것은 아닐 테고, 하느님께서 실현하시고자 하는 정의(正義)가 무엇인지 깨달아 알고, 그 일이 실현되는 일에 협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저희가 당신의 뜻을 겸손하게 따를 수 있는 끈기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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