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강론자료

2008-02-10.....사순 1 주일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8-02-09 ㅣ No.894

사순 제 1 주일 (가해)

창세기 2,7-9; 3,1-7 로마 5,12-19 마태오 4,1-11

2008. 2. 10. 무악재.

주제 : 유혹을 이기려면.......

오늘은 고행(苦行)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이라는 사명을 실천하신, 예수님의 사명을 기억하는 사순시기 첫 번째 주일입니다. 이 사순절은 지난 주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하루 전날인, 성토요일까지 계속됩니다. 날짜로는 46일이지만, 이 사순절의 기간 계산에는 주일을 빼고 계산하기에, 그 기간은 사십일입니다.

 

이 ‘사십 혹은 마흔’이라고 하는 숫자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몇 가지 경우를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전설적인 이야기로 알아듣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세상의 죄악을 씻고 인류를 깨끗하게 하겠다고 작정하시고, 하느님이 하늘에서 비를 내린 기간이 40일(창세기 7,12)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머문 기간이 사십일(탈출기 24,12)이었고, 시나이 산 아래 광야에서 하느님을 거부하던 못된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모두 사라질 때까지 그들이 헤맨 기간도 사십년(탈출기 16,35)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순절의 출발점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인류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이 광야에서 특별한 자세로 지낸 기간도 40일(마르코 1,13)이었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셈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본보기는 이렇습니다.

 

이 본보기를 말한 목적은 우리가 이 사순절 시기를 어떠한 자세로 지내는 것이 좋겠는지, 함께 생각하자는 의미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말씀드리는 목적은 그러하지만, 우리가 이 기간을 어떻게 지내든지 시간은 흘러갑니다. 다만 똑같이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 자세가 다르다면, 부활을 기억하는 축일에 도착할 때쯤 되면, 사람에 따라서 달라도 뭔가는 다를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십이나 마흔’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뜻이 인류에게 이루어지기 위한 준비기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본질인 영혼이 하느님 대전에 출두하기 전, 혹시라도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신다면, 합당하고 정당하게 살았노라고 대답할 준비는 하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류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그렇게 단단한 결심을 하시고, 정하신 기간을 마치자, 그 결심을 꺾기 위해서 등장한 악마는 세 가지 유혹을 내밉니다. 이렇게 등장한 유혹은 우리 인간들도 삶을 통하여 만나게 되는 아주 기본적인 일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일, 남들 앞에서 내 명예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뻔히 보이는 위험을 이길 수 있다고 만용을 부리는 일,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행동하는 재산이나 돈에 관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소홀히 여길 수 있는 일은 누구나 겪기 쉬운 유혹의 한 가지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삶에 유혹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삶의 결과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혹의 본질입니다. 내가 어떤 이의 꾐에 빠져서 이상한 일을 했는데, 그 삶의 결과가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고,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게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유혹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유혹하는 자였던, 악마가 인간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방법으로 멋있게(?) 꾸며낸 유혹을 과감하게 이겨내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 아래에 잠겨 있는 본질(本質)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그렇게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살 수는 있습니다. 다만 쉽지 않을 뿐입니다.

 

파멸로 끌어당기려고 예수님께 도전한 것이 악마였는데,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연약한 조건들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더 쉽게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 각자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자부한다고 해도, 우리는 영과 육이 합쳐진 한계를 안고 사는 존재들이고, 그 악마는 순수한 영적인 존재이기에 우리가 그냥 이길 수 있는 재간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으로서 유혹에 빠진 과정, 그 본보기가 창세기에 나오는 원죄(原罪)이야기입니다. 원죄의 과정을 전하는 이야기가 전설일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죄의 구렁으로 빠지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담은 계명과 말씀은 인간의 삶에서 편리한 대로 해석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 붙습니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법칙들을 해석할 때, 우리는 팔을 안으로 굽히듯이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아듣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동산 한 가운데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기 2,17)고 하신 것이 아담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었는데, 이 명령을 악마인 뱀은 조금 바꾸어서 이용합니다.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된다고 했다는데......(창세기 3,1)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응답하려고 했던 인간은 자기가 들었던 하느님의 명령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고 하셨다고 말입니다(창세기3,3). 그렇게 시작된 유혹에 뱀으로 등장한 유혹자는 이렇게 말을 맺습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창세기 3,5)”이라고 말입니다. 이 유혹자가 한 말의 결론을 새겨보면, 뭐가 뭔지 모르게 헷갈리게 돼 있습니다. 내가 듣고 배우고 익혀야 할 하느님의 뜻이 이것인지 저것인지 혼란스럽게 하여, 우리의 판단력을 흐려 놓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악마의 밥이나 빵이 되고 맙니다.

  죄는 우리 삶에 아주 쉽게 들어옵니다. 그러나 한번 자리 잡은 이 죄라는 녀석은 좀처럼 나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 죄와 더불어 살려고 애쓰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산다면 우리가 구원이라는 선물에 다가가기는 힘들어지는 일입니다. 이런 태도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지혜를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서 배울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현실을 잘 대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지혜를 더불어 청할 일입니다.



78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