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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구약] 소예언서 읽기: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여라(말라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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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4242

[소예언서 읽기]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여라(말라 3,22)

 

 

기차역에서 어떤 분이 전화하는 말 한마디를 들었습니다. “연막탄을 쏴야 하는데 조명탄을 쐈어. 조명탄이 온통 다 터진 걸 생각해 봐.” 그 말을 들으며 혼자 웃었습니다. 전투에서 연막탄을 쏘아 어둡게 덮으려고 했는데 조명탄이 터져 모든 걸 훤히 드러내고 말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말라 3,22-24은 우리에게 예언서 전체, 또는 구약성경 전체를 뒤에서 비추어 주는 조명탄과 같다고 보면 좋을 듯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구약성경은, 오실 분을 기다리는 책이 됩니다. 말라 3,22-24은 한마디씩 새겨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좀 딱딱하겠지만 잘 곱씹어 보기 바랍니다.

 

 

“나의 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여라”(3,22 참조)

 

3장 22절의 첫 구절은 ‘너희는 나의 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여라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세 장짜리 말라키서를 끝맺는 말씀이 아니라 예언서 전체를 끝맺는 말씀으로, 예언서와 율법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히브리 성경의 차례나 책을 구분하는 방법은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과 다릅니다. 책 전체가 토라, 예언서, 성문서의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신명 34장에서 모세의 죽음으로 토라가 끝난 다음, 바로 이어지는 여호수아기부터 예언서가 시작됩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역사서라는 구분이 없고 그리스도교가 역사서로 분류하는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를 전기 예언서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예언서를 시작하는 첫머리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뒤를 이어 통수권을 받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즉 당신께서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맹세하신 땅을 정복하여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시며, “오직 너는 더욱더 힘과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율법을 명심하여 실천하고,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여호 1,7)고 이르십니다. 그 율법을 밤낮으로 되뇌어 명심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여호 1,8 참조). 이 구절이 토라와 예언서를 연결해 줍니다.

 

여호수아기가 왜 예언서로 분류될까요? 히브리 성경의 분류법에 따르면, 모세의 전통을 이어 가는 이들이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모세가 못다 이룬 일, 곧 영토를 정복하여 분배하는 일을 이루어야 하지만, 그 일에 성공하기 위해(여호 1,8 참조) 필요한 것은 율법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역사에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살도록 깨우치는 것, 이것이 여호수아 이후로 이어지는 예언자들의 역할이었습니다.

 

이제 이러한 권고로 시작된 전기 예언서 4권(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과 후기 예언서 4권(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열두 소예언서)을 모두 끝마치면서, 말라 3,22에서 다시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예언서의 시작과 끝에서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는 권고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예언서 전체가 할 일은 다름 아닌 그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 모세에게 내린”(3,22)

 

그런데 그 “모세의 율법”은 모세라는 한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 공포한 법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3,22) 모세에게 내리신 법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흔히 모세의 율법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율법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각별히 여기서 “규정과 법규”라는 표현은 신명기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것이어서(신명 5,1; 11,32; 12,1; 26,16) 눈길을 끕니다. 이 표현 때문에 말라키서에서 말하는 율법이 특히 신명기 법전의 내용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성경의 큰 틀을 짜는 데 신명기계가 미친 영향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3,23)

 

이 구절도 특별합니다. 지난 호의 내용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말라키서에서 이 구절이 종말론의 큰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예언서들이 처음부터 종말론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고 더구나 전기 예언서의 경우 그러한 차원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언서들이 묶여 하나로 완성되던 시기에 말라키서의 저자는, 특히 이 끝 부분을 쓴 사람은, 모세의 율법을 상기시키는 예언자들의 말이 주님께서 오실 날과 관련하여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예언자들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함께하면서 이스라엘이 끝까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살도록 이끌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오시는 주님을 맞을 수 있게 준비시켜 준다고 본 것입니다.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엘리야는 그 마지막 순간에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리라고 일컬어집니다. 엘리야는 예언자들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루카 9,30)는 각각 율법과 예언서를 나타냅니다. 어떤 이들은 엘리야가 탁월한 의미에서 모세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한 다음, 엘리야는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1열왕 19,8-18 참조).

 

호렙 산은 모세가 하느님을 처음 만났던 시나이 산을 가리킵니다. 온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계약을 저버리고 있었을 때 하느님을 향한 열정에 불타올랐던 엘리야는(1열왕 19,14 참조) 그 호렙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모세의 율법을 떠나 하느님께 등을 돌렸던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려 했습니다. 또한 그는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지요(2열왕 2,11 참조).

 

엘리야는 죽지 않았기에,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말라키서는 그가 와서 주님의 날이 파멸의 날이 되지 않도록 하리라고 말합니다.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주님의 날은 멸망의 날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마태 17,12)

 

그리스도교의 성경이 히브리 성경과 책의 배열 순서를 달리하면서 예언서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예언서들이 모세의 전통을 이어 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리스도교 성경에서 예언서들은 신약을 준비하는 책이 됩니다.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는 책인 예언서들이, 신약성경에서 완성에 이릅니다.

 

이렇게 바뀌니 말라 3,22-24은 구약성경 전체를 끝맺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신약성경으로 넘어가는 문턱이 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여러 차례 인용하며(마태 17,10-13; 마르 9,11-12; 루카 1,17), 이것이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면 예수님에 앞서 엘리야가 왔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한 주장을 부인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께 물었고, 예수님께서 엘리야는 이미 왔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그 말씀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을 말라 3,23에 언급된 엘리야라고 봄으로써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연결됩니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이 길을 준비하며 오실 분이라고 했던, 구약에서 기다리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가리켜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이 성경으로 인정하던 것은 구약성경뿐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약성경의 책들이 비로소 생겨나던 시기에 복음서들은,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오리라고 예고했던 구약성경의 권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심을 확증해줍니다.

 

이제 예언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가 되어 이야기가 마무리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말라 3장의 이 세 구절이 구약성경의 마지막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미 오셨지만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이 예언서들은 지금도 기다림을 준비하는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금년에도 우리는 대림 시기를 맞이합니다.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까지, 예언서들은 우리에게 그날을 맞을 수 있게 마음을 돌이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일깨웁니다.

 

“그러니 주님을 알자. …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호세 6,3).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2월호(통권 477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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