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

나는 믿나이다: 성체성사 - 죽음과 부활, 죽으면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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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7 ㅣ No.278

[나는 믿나이다] 성체성사 - 죽음과 부활, 죽으면 살리라!

 

 

흔히 교우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는 정기적으로 성당을 찾고, 성사생활을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교회의 성사들은 입문성사(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치유의 성사(고해성사, 병자성사), 친교와 사명을 위한 봉사의 성사(성품성사, 혼인성사)로 구분되며, 이 모든 성사는 성체성사를 지향한다. 우리 교우들은 미사 전례에 참여하여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영성체)을 신앙생활 여부의 기준으로 삼는다. 지난 호에서는 교회 입문성사 가운데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이번 호에서는 우리 신앙생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성체성사를 살펴볼 것이다.

 

 

1. 성체성사는 밥과 같다

 

예비신자들과 교우들이 성체성사를 놓고 묻는 게 있다. “정말 밀떡이 예수님의 살이 되고, 정말 그 포도주가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피로 변하는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이를 두고 ‘성변화’ 또는 ‘실체변화’라는 용어로 설명을 하지만, 쉽게 이해를 하지 못한다.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을 동원해서 설명해도 납득하기 어렵고, 그러다보니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의 ‘신비’라는 말을 써서, 또는 “하느님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다.”는 말로 설명하며, 그냥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마음 한구석에는 믿자니 떨떠름하고, 안 믿자니 그것도 마음이 편치 않고, 해서 “그냥 그렇다고 치자.” 또는 “상징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하는 식이다.

 

필자는 성체성사를 설명할 때 ‘밥상의 한 그릇의 밥’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밥은 그냥 쌀과 물과 열의 조합이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상징물도 아니면서, 생명에 절대로 필요한 양식이기 때문에 그런대로 적절한 비유라 판단해서다.

 

오늘날 식구들이 밥상을 가운데 놓고 오순도순 둘러앉아 밥을 먹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모두가 바쁘기도 하지만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 사회환경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부모형제를 일컬어 흔히 우리 식구(食口)라 하듯이, 밥상은 혈연공동체를 전제하는 상징어이다. 밥상에 한 공기 밥을 올려 내 가족이 먹을 때까지 그 과정에는 단순히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행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식구 가운데 누군가(아버지나 어머니라 하자.) 지친 몸을 이끌고 만원 전철과 버스를 타고 일터에 가야 한다. 출퇴근 시간 전동차 안에 앉아 잠깐 졸며 피곤함을 달랠 수 있으면 다행이나 대부분 사람들과 부대낀다. 환승역에서는 거의 달리는 수준이다. 일터에서는 싫은 소리를 들어도 싫은 내색을 하지 못하며, 자존심이 짓밟히면서도 속앓이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식들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때로는 비굴한 자신의 태도에 화가 난다. 사랑하는 식구의 입에 한 숟갈 밥을 넣어주어 그를 살리고자 스스로는 조금씩 죽어가는 것을 견디는 것이다. 그렇게 일을 해서, 자신을 깎아내서, 그 대가로 손에 넣은 쌀로 식구들이 밥을 먹고 산다.

 

밥상의 밥 한 그릇은 그냥 쌀에다 물을 넣고 열을 가해 끓인 것이 아니다. 한 숟갈의 밥에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눈물과 땀, 희망과 절망, 기쁨과 비굴함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씹어 먹는 것이며, 그의 땀과 눈물을 먹는 것이며, 그의 희망과 절망을 삼키는 것이다. 나의 생명은 그의 생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밥을 먹는 것이지만, 사실은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금씩 죽어가고, 나는 매일 살아간다.

 

그렇게 성체성사는 밥상의 밥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내어주며 우리더러 살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피를 건네주며 우리더러 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몸을 내주고 피를 쏟아 죽어가고, 그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는 산다.

 

 

2. 성체성사 -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 그 가운데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은 곧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표지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내가 나임을’ 밝히려고,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말하며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를 쓴다. “나는 학생이며 철학을 공부한다.”라든지, “나는 노동자이며 건설현장에서 건설자재를 운반하는 중장비를 운전한다.” 하면서 자신을 밝힌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고백한 것이 곧 성경의 예수님의 말씀이며 행적이다. 복음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을 구원하는, 말하자면 사람을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죽음의 세력에서 살리시는 분이며, 그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 그분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절정에 성체성사가 있다.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면 단순히 그분을 머리의 기억으로 담아두라는 뜻일까? 아니다. 그분은 (몸으로) 행하라고 하셨다.

 

무엇을 행하라는 것인가? 단순히 제자들과 하셨던 마지막 만찬을 거듭거듭 행하라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를 수없이 반복해서 행하라는 것이었을까? 그런 뜻도 있다. 예수님께서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속뜻, 참뜻은 당신을 기억 속에 가두어두지 말고 몸으로 당신처럼 살아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당신처럼 복음 곧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고, 사람을 살리고자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고,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며,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라는 뜻일 것이다. 세상의 혼돈 속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고, 오류의 어지러움 속에서 진리의 횃불이 되고, 죽음의 세력 앞에 용감하게 생명의 양식이 되라는 절박한 당부의 말씀일 것이다.

 

당신을 기억한다면 제자들도 당신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시는 것이다. 비록 당신처럼 살면 당신처럼 죽게 될 것이나(어둠을 밝히려면, 짠맛을 내려면 초와 소금은 녹아야만 하므로), 바로 그 희생과 죽음이야말로 세상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기쁜 소식이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완결임을 마지막으로 호소하시는 것이다.

 

당신을 기억한다고 하면서도 당신처럼 살지 않는다거나, 단순하게 주님의 만찬을 반복한다거나 기계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그친다면,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 그분이 떼어낸 살은 사라지고 말 수많은 세상 사물과 하나도 다를 것 없으며, 그분의 희생과 사랑과 구원 역시 세상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밖에 안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음으로써 성체성사는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된다.

 

 

3. 성체성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저마다 자기 살길을 찾아 몸부림을 친다. ‘자유로운 경쟁’이야말로 ‘모두가 살길’이라고 외친다. 지독한 모순이다. 경쟁이란 본디 앞섬과 뒤처짐을 가져오는 것이고, 모두가 살길이란 동행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경쟁은 승부를 내야만 한다. 연장전이라도 해야 하고, 하다못해 동전 던지기라도 해서 승자와 패자를 결정해야 한다. 무한 자유경쟁의 길과 공존의 길은 결코 만날 수 없다. 경쟁의 목표는 승리이며 공존의 조건은 양보이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을 신조로 삼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성체성사는 도드라져 보인다. 깜깜한 밤을 밝히는 촛불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두움이 짙어도 촛불 앞에서는 그 위세를 잃는다. 한 자루 초가 자기를 녹임으로써 빛을 밝히는 것처럼 성체성사는 자기 살을 베어내고 자기 피를 쏟아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서, 하느님 사랑의 극치이다. 이것이 성체성사를 ‘예수님의 몸과 피의 희생제사’(“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271항. 이하 교리서로 표기), 사랑의 성사라 하는 이유다.

 

자기가 살겠다고 남을 죽이려 드는 세상에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남을 이기려드는 세상에서, 남을 살리겠다고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태연히 희생제물로 나서는 것은 분명 어리석다. 성공신화를 좇아 내달리며 이웃이 내민 손길을 매정하게 뿌리치는 세상에서 스스로 걸음을 멈추고 뒤처진 이와 동행하고자 역행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용감함이다.

 

십자가에 매달리면서까지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의 삶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곤혹스럽게 한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자니 그분처럼 현세의 낙오자가 될 것 같고, 세상의 길을 좇자니 신앙이 발목을 잡는다.

 

 

4. 성체성사는 사랑과 정의의 절정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희생제물로 삼으실 정도로 사람을 사랑하셨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의 죄 값을 치러야 하겠고, 당신 아들까지 우리의 죄 값으로 내어놓으실 정도로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우시다. 하느님의 그 사랑과 정의에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순종하셨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정의를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통해 보여주셨으니, 오늘날 교회의 성찬례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 한복판에서 희생의 제사를 봉헌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살리시고자 당신 살과 피를 건네주셨듯이, 그리스도인은 오늘 이 세상을 하느님과 결합시키고자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교회의 성찬례는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따위를 그리스도의 그것들과 결합”(교리서, 281항)시킨다.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행할 것은 예수님의 삶이며, 예수님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자기 비움이다.

 

이 성체성사를 우리는 “성찬례, 미사성제, 주님의 만찬, 빵 나눔, 성찬 모임,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기념, 거룩한 희생제사, 하느님의 거룩한 전례, 거룩한 신비, 지극히 거룩한 제단의 성사, 영성체(친교)”(교리서, 275항)라고 한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경향잡지, 2008년 8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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