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성미술 이야기: 세상을 짓는 큰 목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7-04 ㅣ No.25

[성미술 이야기] 세상을 짓는 큰 목수

 

 

- '중세의 우주도' 14세기 프랑스 채식필사본, 국립도서관 파리.

 

 

종교의 거울에 비친 예술가의 심정 담아

 

시인 단테는 천국의 마지막 하늘을 순례하면서 『이 세상은 한 권의 책』이라고 고백한다. 창조주가 보시기에도 좋았다고 말씀하신 세상의 책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 예술가들은 경건의 붓을 기도에 적셔서 커다란 그림책을 그려낸다. 창조주의 의지를 엿보면서 그 그림자라도 밟을까 조심스레 그린 그림들이다.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는 종교의 거울에 비친 예술가들의 이처럼 삼가는 마음과 여미는 심정을 담는다. 믿음과 예술이 만나는 기적의 현장, 성미술의 수호자 「성 루가」의 아틀리에를 들여다보자.

 

 

컴퍼스로 재고 굴리며 세상 만드시는 하느님

 

세상은 누가 만들었을까? 세상이 처음 지어질 때의 광경은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다. 창조주의 모습도 본 사람이 없다. 그러나 시인과 예술가들은 상상과 영감의 날개를 어깨에다 걸어 매고 그 때의 장엄하고 거룩한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꿈꾸듯 가라앉은 그들의 눈까풀 밑에서는 하느님의 의지가 빚어내는 상서로운 풍경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지 않았을까?

 

 

중세시대 창조의 개념

 

중세시대 필사화가는 세상을 지어내는 창조의 순간을 이렇게 상상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창조주의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다. 아무 것도 안 신은 맨발로 성큼성큼 걸음을 떼면서 혼돈의 덩어리를 굴리는 모습이 천상 굴렁쇠 지치는 어린아이를 빼 닮았다. 근사한 수염과 뒤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은 근엄하다기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적에 설레는 모습이다. 두 뺨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옷자락도 덩달아 신바람을 낸다. 창조주는 솔기 없는 파란 옷에 붉은 겉옷을 두른 옷차림이다. 여기서 진청색 속옷은 존재의 존귀함을, 진홍색 겉옷은 주인됨의 위엄을 뜻한다. 말똥구리처럼 세상을 동그랗게 굴려서 완성하는 창조주는 스스로 빚어낸 세상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쏙 빠진 표정이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창세기 1,1~2)

 

세상이 지금 막 탄생하려는 참이다. 어디선가 우주의 웅장한 교향악이 귓전을 울리는 것 같다. 동그랗게 생긴 우주는 껍질이 호두처럼 단단한데, 그 속은 어머니의 아기집처럼 말랑말랑하다. 창조주가 세상을 굴리는 동안 하늘과 땅, 빛과 어둠이 스스로 제 자리를 찾고 파도치는 푸른 하늘의 치맛자락에서 어린 별들이 앞다투어 솟아 나온다. 이쯤 되면 땅도 하늘도 혼돈의 반죽덩어리다. 아직 아무 것도 제 형상을 갖추지 못했지만, 세상에는 생명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그렇다면 생명의 기운은 어디서 왔을까? 창조주의 눈빛에 깃든 생명의 기운을 성서에서는 지혜라고 부른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짓기에 앞서 제일 먼저 지혜를 지어내셨다는 것이다.

 

『야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 처음에 모든 것에 앞서 나(지혜)를 지으셨다. 땅이 생기기 전, 그 옛날에 나는 이미 모습을 갖추었다』(잠언 8,22)

 

그런데 이 그림에는 이상한 곳이 한 군데 있다. 창조주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컴퍼스다. 큼직한 컴퍼스의 다리는 세상 한복판에 하나, 그리고 바깥 경계에 다른 하나가 닿아 있다.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감아쥐고 세상의 중심을 누르고 바깥 둘레를 측량하는 창조주는 집 짓는 목수처럼 표정이 진지하다. 중세 시대의 필사화가는 이렇게 근사한 컴퍼스를 어디서 가지고 왔을까?

 

이 그림은 13세기초에 프랑스 궁정의 주문으로 그려졌다. 13세기라면 고딕 교회 건축의 전성기다. 1145년께 생 드니에 첫 고딕 교회를 짓고 나서, 100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만 80여 개의 고딕 교회가 세워졌다니까 도시마다 돌을 깎고 다듬는 소리가 요란했을 때였다. 천상의 예루살렘을 지상에다 재현하는 작업에서 솜씨 좋은 건축장인들은 컴퍼스와 곡자를 들고 밤늦도록 신성한 비례의 규칙에 대해서 신학자들과 토론을 나누었다.

 

 

13세기 프랑스 궁전서 주문

 

여기서 컴퍼스는 꼭지 하나에 다리가 둘이 붙어 있는 측정도구다. 다리는 너비를 조절할 수 있고, 또 한 바퀴 돌려서 원을 그릴 수도 있다. 중세 시대에 원은 수많은 도형 가운데 가장 완전한 도형으로 불렸다. 덕분에 원을 그리는 컴퍼스도 목수가 사용하는 온갖 작업도구 가운데 으뜸자리에 올랐다.

 

컴퍼스는 또 양쪽 다리를 벌려서 여하한 거리를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수의 비례를 다루는 기하학과 수학을 상징하게 되었다. 컴퍼스는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수의 관계로 이루어진 비물질의 이데아로부터 물질적 실현으로서 형상을 짓는 일에도 적합해서 지혜, 정의, 철학, 멜랑콜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쓰임새가 많다보니 둥글고 원만한 우주의 경계를 정하고, 남거나 모자람 없이 반듯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지어내는 작업도구로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주의 배꼽에 컴퍼스를 갖다대는 창조주의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어 보인다. 성서 창세기 편을 들추어도 컴퍼스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을 뿐더러, 이런 창조주의 모습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말씀이 계셨고,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서 태어났고, 그로부터 생명을 얻었다』(요한 1, 1~4)는 이야기하고도 영 안 어울린다.

 

애당초 우주를 짓는 목수 이야기는 플라톤의 책 「티마이오스」에서 나왔다. 수의 설계도를 그리고 비례의 벽돌을 쌓아서 조화롭고 완전한 우주의 질서를 창조하는 큰 목수의 그림은 철학자 보에티우스를 거쳐서 그리스도교 미술의 안방자리를 차지한다. 한편, 그보다 앞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지혜서의 한 구절을 기억하고 신성한 아름다움을 새롭게 정의한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잘 재고, 헤아리고, 달아서 처리하셨다』(지혜서 11,20)

 

여기서 「잘 재고」, 「헤아리고」, 「달아서」 세상을 내셨다는 구절을 두고 중세 신학은 창조주가 컴퍼스와 자와 저울을 지참하셨다고 해석했다. 황금빛 신성의 광채가 아니라 수의 질서와 비례의 규범이 신적 아름다움의 실체를 밝히는 실마리가 된 것이다.

 

또 고딕 교회의 첨탑이 하늘 높이 치솟고, 이마에 수건을 두른 석공들의 망치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그들이 상상했던 창조주의 모습도 바뀌기 시작한다. 말씀과 빛을 통해서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대신 혼돈의 덩어리를 두 손으로 직접 주무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전에 없던 변신이었다. 또 허리를 구부리고 맨발로 걷기 시작하는가 하면, 컴퍼스까지 들고 등장한다. 빛과 어둠을 호령하던 신성한 능력은 어디다 두었는지, 한여름 포도원에서 일하는 성실한 일꾼처럼 팔뚝을 질끈 걷어 부쳤다. 이처럼 땀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하느님의 모습은 교회 건축가들에게도 믿음의 기운을 북돋았을 것이다. 모양 없는 돌을 깎아서 새 예루살렘을 세워 올리는 그때 건축장인들은 혼돈으로부터 세상 질서를 지어내시는 창조주가 자기네들처럼 컴퍼스를 들고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은근한 자부심에 어깨가 으쓱했을 테니까.

 

‘세상을 지으시는 하느님’, 34.4x26cm, 빈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그림 상단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보라, 하느님이 하늘과 땅, 해와 달, 그리고 모든 원소들을 지어내신다」

 

‘중세의 우주도’, 14세기 프랑스 채식필사본, 국립도서관 파리

 

중세 시대는 그리스 천문학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핵을 이루고, 바깥으로 달과 해와 행성들의 하늘이 에워싸고 있다. 맨 바깥은 붙박이 별들의 하늘이다. 지구 밑바닥에는 사탄이 머리를 뒤집고 누워 있고, 위쪽 하늘 복판에서는 하느님이 그를 내려다본다. 하늘 네 귀퉁에 붙은 천사, 독수리, 사자, 황소는 예언자 에제키엘이 보았던 환영의 동물들이다. 여기서는 지식의 드러냄을 의미하는 네 복음서의 상징이다.

 

‘우주를 돌리는 천사들’, 14세기, 브리티시 도서관, 런던

 

중세 신학은 우주 운행의 모습을 이렇게 상상했다. 하느님의 일꾼 천사 둘이서 연자맷돌을 돌리듯이 행성들의 하늘을 움직인다. 신은 세상을 내고 주재하는 전능한 존재로서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 둥근 세상의 네 구획은 인간 삶의 4 단계가 진행되는 4 방위, 4 원소, 4 계절, 4 대륙을 의미한다.

 

* 노성두씨는 1959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한국 외국어대학교를 나왔고 독일 쾰른대학교 철학부에서 서양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대와 근대 미술을 전공했고 "고전미술과 천번의 입맞춤", "유혹하는 모나리자", "천국을 훔친 화가들", "보티첼리가 만난 호메로스"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3월 30일, 노성두]



1,46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