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문영인 비비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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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8-12 ㅣ No.1337

[124위 시복 특집] 문영인 비비안나(1776-1801년)


“제가 공경하는 천주를 위해 목숨 바치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문영인 비비안나는 한양에 거주하던 중인 집안의 딸로 태어나, 일곱 살이 되던 해에 궁녀로 뽑혀 궁궐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글씨를 잘 쓰게 되자 궁궐에서는 그녀에게 문서 쓰는 일을 맡겼습니다.

스물한 살 되던 1797년에 문영인은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잠시 궁궐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한 노파를 만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교리를 배웠습니다. 1798년, 문영인은 여회장 강완숙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도 가끔 강완숙의 집에 모여 교우들과 교회 서적을 공부하거나 미사를 드렸습니다.

병이 완쾌된 문영인은 다시 궁궐로 돌아가야 했는데, 당연히 궁궐에서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몹시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 기도 생활을 하였고, 끝내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발각되어 궁궐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제 신자의 본분을 지키는 데만 마음을 쓸 수 있게 된 문영인은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모범을 본받으려 하였으며, 열심히 기도하는 동안 자주 순교의 뜻을 드러내곤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집에서도 쫓겨나게 된 그녀는 청석동에 집을 얻어 살면서 헌신적으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1800년, 정약종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해 오자 그에게 집을 빌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문영인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순교할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된 후 혹독한 형벌 중에 정신이 혼미해져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라며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습니다. 이후 문영인은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 했지만 무엇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흔들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문영인은 열심히 교리를 설명하면서 본인이 천주교 신자임을 증명하였습니다. 문영인은 1801년 7월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그녀는 25세의 동정녀였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문영인이 형벌을 받을 때에 다리에서 나오는 피가 꽃으로 변하여 공중으로 떠올랐고 참수를 당할 때는 목에서 나오는 피가 젖과 같이 희었다고 합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8월 10일 연중 제19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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