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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는 성령을 지피는 일 - 1테살 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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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03 ㅣ No.468

[영성의 샘] 기도는 성령을 지피는 일 (상) 1테살 5,17-19


1) 기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 하십시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1테살 5,17-19)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께서 당신 부르심의 가치를 여러분에게 적합하게 해주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2테살 1,11) 나는 나의 기도 안에서 여러분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로마 1,9)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한마디의 말로 표현해 본다면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신앙인입니다.’ 그렇게들 기도하시면서 살아가시지요?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렇게 기도의 말로 인사하곤 합니다. “찬미예수… 기도해 주십시오. 기도를 부탁합니다. 당신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 안에서 만나겠습니다. 기도 중에 뵙겠습니다. 기도 중에 함께 합니다. 그렇게들 살아가시지요? 우리는 어떠한 이유들로 위와 같은 기도의 말들을, 기도의 언어들을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혹시라도 기도가 우리에게 짐, 부담, 무게가 되고 있지는 않을까요? 때로는 의무감, 책임감, 강박감으로 드리는 것은 아닐까요? 저의 어린 시절에는 거의 기도를 의무감, 중압감으로 드리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한 사제로 살고 있는 지금에는 더욱이나 그 어린 시절의 의무적인 기도들도 지금 저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비록 의무와 책임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은 그 모든 기도조차도 다 듣고 계시며, 들어주시기까지 하신다. … 기도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기도한다는 생각만 가지고도, 기도의 마음과 의지만 가지면 이미 그때부터 기도는 시작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2) 기도의 주체는 우리가 아닌 하느님

기도의 주체는 우리 자신들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기도를 듣고 받으며 들어주시는 분은 당신의 영인 성령으로 날마다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고, 하느님은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헨리 뉴우웬(1932~1996, 심리 영성작가. 그는 참으로 많은 영성저술을 하였는데, 특히 ‘돌아온 아들’, ‘제네시 일기’ 등은 매우 유명하다.)은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헨리 누우웬의 작품들과 함께 기도생활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기도 없는 영성생활은 그리스도 없는 복음과 같다. 만일 기도가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성이라고 이해한다면, 참으로 그것은 또한 다른 모든 이들과의 만남에도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성, 이웃과의 새로운 만남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Reaching out)

진정한 기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범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두루 껴안습니다.(Prayer embraces the World)

기도는 나의 의식적인 생활과 무의식적인 생활 사이의 가교(다리)입니다. 기도는 나의 마음과 가슴, 열정, 머리, 배와의 연결입니다. 기도는 나의 존재의 모든 구석들을 꿰뚫으시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진리가, 하느님의 사랑이 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존재, 일치, 내적인 평화의 신적 도구입니다.(Sabbatical journey)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하느님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Clowing in Rome)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믿고 바라며 사랑하는 하느님의 영과 현존 안에서 살고 머무르는 것이다…” 곧 나의 정신이나 마음이 아닌 하느님의 현존이,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진리가, 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사로잡도록 하는 것이다…”바오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언제나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우리는 가끔씩 우리 자신들을 발견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인간의 조건과 이름으로 바쁜 일상과 삶을 살아가다 보면, 기도의 맛과 기쁨을 잊고서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어느 사이에 하느님의 정신과 뜻보다는, 나의 계획과 생각에 따라서 존재하고 행동하는 나의 모습과 삶을 쉽게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기쁨이나 믿음과 기도의 의미도 쉽게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다시 마음과 귀를 기울입니다. ‘늘 기도하십시오. 감사하고 성령의 불을 끄지 않은 채…’

삶과 믿음의 길에서, 생애와 신앙의 길에서 때때로 이따금씩 지치기도 하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마태 12,29~30)


3) 기도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사랑하는 일

항상 기도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늘 기도하며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일터, 생계, 삶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다 짐 지워져 있는데, 어떻게 기도만을 할 수 있을까? 특히 어떻게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인간 마음과 영혼, 자신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주신 것 같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이는 다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멍에는 편하며 나의 짐은 가벼우니… 나에게 와서 쉬고 먹으며 나와 함께 할 것이니…’ 그렇게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 달려가고, 그분 앞에 무릎 꿇으며, 그분 안에 엎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나의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으니…’ ‘내가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누구든지 나에게 문을 열면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쉬리라…’

우리는 기도의 느낌, 생각, 말들을 통해서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크고 작은 희생, 봉사, 일들의 기도의 행동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기도는 우리 인간 영혼에게 하느님을 느끼고 만나는 사랑, 평화, 은총의 기쁨을 선물해 줍니다. 아울러 우리는 기도 중에 치유의 은총을 만나기도 합니다. 헨리 누우웬 신부님은 말합니다. 기도는 치유의 자리로 모든 슬픔을 이끌어줍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따스한 사랑이 분노와 미움의 차가운 마음의 얼음을 녹게 하는 것이며, 슬픔에는 기쁨을, 쓰디쓴 찬탈(簒奪)에는 자비를, 두려움에는 사랑을, 배신과 서로 다름의 차이를 극복하는 점잖음과 돌봄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하느님 사랑의 친교에로까지 모든 사람에게 열린 예수님 선교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Prayer embraces the World)

우리는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마음에 어둠과 아픔이 오고 괴로움 중에 기도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영혼의 쓰라림과 고통에서 기도합니다. 기도를 드리는 중에, 기도 안에서,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은 우리에게로 가까이 오십니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느님, 나의 곁에 계시는 하느님, 나의 손 잡으시는 하느님, 나에게 손 얹어 위로하시는 하느님, 나를 낫게 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서 현존(現存)하시는 분이십니다. [쌍백합, 제16호, 2007년 봄호,
윤양호 신부(교구청 사무처)]


[영성의 샘] 기도는 성령을 지피는 일 (하) 1테살 5,17-19


4)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빛을 받는 일

기도한다는 것은 죄, 어둠, 그늘, 고통, 비참으로 얼룩지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거룩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다… 모든 것들은 사라져가도 하느님만이 영원하시지요.… 모든 것들은 없어져 가더라도 하느님은 남습니다.… 영원히 영원히….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는 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와서 배워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나의 짐은 편하다…’ ‘나의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으니….’

기도는 하느님께 달려가는 것, 다가가는 것, 찾아가는 것, 가져가는 것, 드리는 것, 봉헌하는 것, 아뢰는 것, 말씀드리는 것, 말하는 것, 들음, 바라봄, 응시함, 머무름, 고요함 등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누우웬 신부님은 말씀하십니다.

한편 기도는 우리 인간 영혼들의 마음, 의지, 태도를 하느님께 드리는 것 이외에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라는 말씀은 또한 시간을 넘어서서 기도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우웬 신부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기도생활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의 시간들에 따라서, 기도의 양에 따라서, 기도의 내용에 따라서 달라질 것임이 분명합니다. 여러 기도, 묵주기도, 성체조배, 미사, 나눔과 봉사, 정기적인 피정, 세미나 참석 등등… 그렇게들 잘하고 계시지요? … 그렇게들 하시지요?


5) 기도의 힘

한때 미국사회를 영적인 이야기로 움직이시던 주교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은 당대의 유명하신 피정 지도자, 강론가, 연설가, 대중 매체를 활용하던 강연가이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풀톤 쉰(1895-1979) 주교님이신데, 그분의 강론 시간이 되면 지나가던 택시들이 한쪽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서 혹은 일제히 라디오 채널을 그분의 강론시간에 맞추어서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대담프로에서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주교님은 그러한 영적강론에 탁월하시고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십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주교님이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강론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말씀으로부터 오는 묵상을, 성체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각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매일 한 시간씩 성체 앞에서 머무르지 않으면, 제가 살아갈 힘을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지요…”

전통과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서의 훌륭하신 성인성녀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말씀과 기도 안에서 살았던 분들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말씀과 기도의 생활로 우리가 변하지 않고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들이 말씀 안에서 살고 성체중심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행하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속빈 강정이 될 위험이 많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처럼,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 됩니다.’ 교회안의 영성가들의 말처럼,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은 하느님을 모르는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제자들이 어느 하루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이시여, 어떻게 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비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스승은 한참이나 제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노동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노동하지 않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사도의 말씀을 따르려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대들이 먹고 잠을 잘 때는 누가 그대들을 위하여 기도합니까?” 그들은 아무 대답을 못했습니다… 스승이 천천히 말했습니다. “우리는 노동을 하면서도 쉬임없이 기도할 수 있네. 하느님과 함께 노동의 도구를 들거나 잡게. 삽, 괭이, 호미, 혹은 다른 도구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좋으심과 당신 자비의 풍요에 따라, 저의 죄로부터 저를 구하소서…’(Pray without ceasing, The Sower's seeds)”


6) 예수의 기도, 기도는 호흡과 같이

잠시 같이 해보기로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나를(저를, 저에게) 불쌍히 여기소서(자비를 베푸소서.) /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저를, 저에게) 불쌍히 여기소서.(자비를 베푸소서.) / 예수여 나를(저를, 저에게) 불쌍히 여기소서.(자비를 베푸소서.) / 예수여…”

기도는 우리 인간 영혼들의 바람과 아룀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들, 기도는 호흡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먹고 마시며 행동하고 쉬며 가르치고 배우며 놀고 일하는,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현존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두려움 없는 대화 속으로, 두려움의 격리로부터 나와서 하느님과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우리는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 절망과 고통 속에서 힘없이 길을 가던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함께 길을 걸으시면서 새로운 힘과 영혼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던 부활하신 예수님… 때때로 많은 날들 우리 삶에서 겪고 만나는 어려움에서도 기도를 통하여, 기도 안에서 새로운 힘과 용기, 은총을 입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안에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쌍백합, 제18호, 2007년 가을호,
윤양호 신부(교구청 사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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