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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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9: 신유박해 순교자(중인, 양인 신분의 서울 순교자 1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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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01 ㅣ No.1109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상반기 공개대학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9 · 끝) 신유박해 순교자 - 중인 · 양인 신분의 서울 순교자 11위


조선 후기 신분제는 양반 - 중인 - 양인 - 천인 체제를 유지한다. 이 가운데 중인은 양반에서 도태되거나 양인에서 신분이 상승한 중간층을 일컫는데, 이들이 서울의 중간 지점인 청계천 일대 북촌과 남촌에 거주하던 데서 유래한다. 중인은 주로 역관이나 의관, 율관(법률사무), 천문관, 서리, 향리 등으로 활동했다. 양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양인보다는 우위에 있던 하급 지배계급이었다. 다만 승진에 제한을 받아 육조(六曹)나 삼사(三司) 등의 주요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조광(이냐시오) 고려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에 따르면, 신유박해기 신자들의 신분은 양반이 27.9%, 중인이 13.1%, 양인이 25.7%, 천인이 5.5%, 신분을 알 수 없는 자가 27.7%를 차지했다. 이는 1790년 천주교의 조상제사 금지 사실이 알려지고, 1791년 진산사건이 발생해 신해박해가 벌어지면서 교회 지도층 양반 가운데 일부가 교회를 떠나거나 멀리하게 되는 와중에서 10년 만에 교회가 재편된 결과였다.
 
신유박해 이후 교회 지도층 38명의 신분을 분석해 보면, 양반이 9명(22.68%), 중인 21명(55.26%), 양인 신분이 5명(13.16%), 미상 3명(7.89%)으로, 교회 주류가 양반 신분에서 중인 신분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대표적 교회 지도층 가운데 한 사람이 역관 집안 출신 최창현(요한, 1759~1801)이다. 1784년 조선교회 창립 직후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초기 교회 가성직 조직의 일원으로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서민 대중이 읽지 못했던 한역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데 기여했는데, 그 책이 1636년 예수회원 엠마누엘 디아즈 신부가 중국에서 번역해 펴낸 「성경직해(聖經直解)」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 입국 이후엔 조선교회 총회장으로서 교회를 유지시켰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하면서 체포돼 그해 4월 8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한다.

최필공(토마스, 1744~1801)은 의원 집안 출신이었다. 1791년 신해박해 당시 체포됐을 때 다른 신자들은 배교하고 석방됐으나 그만은 배교를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정조의 유화책에 마음을 고쳐먹고 관서 심약(審藥, 궁중에 바치는 각 지방 약재들을 심사하고 감독하기 위해 각 도에 파견하던 종9품 벼슬)에 임명돼 혼인을 하기에 이른다. 평안도에 부임한 최필공은 그러나 천주께 등을 돌린 심약함을 자책하다가 3년 뒤 심약 직무를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편자동에 약방을 마련하고 다시 신앙생활을 한다. 1800년 12월 말 체포 투옥된 그는 "천주교 신앙에 대한 믿음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며 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길을 걷는다. 최필공의 사촌동생으로 역시 의원 집안 출신인 최필제(베드로, 1770~1801) 또한 1800년 말 체포돼 이듬해 5월 1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한다.

역관 집안 출신인 최인철(이냐시오, ?~1801)은 1795년 순교한 최인길(마티아)의 동생으로, 천주교가 들어오자 일찍이 형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고 1791년 신해박해 당시 신자들과 함께 형조에 체포되기도 했다. 일시 배교해 석방됐으나 곧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형과 함께 신앙생활을 계속했으며 나중에는 교회 중심인물로 지목돼 '사학의 괴수'라고까지 불렸다. 1801년 체포돼 그해 7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됐다.

김이우(바르나바, ?~1801)ㆍ현우(마태오, 1775~1801) 형제는 역관 집안 출신으로, 김범우(토마스)의 넷째, 다섯째 이복동생이다. 김범우의 인도로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은 형제는 최필제 등 교회 지도층과 어울렸고, 김이우의 집에선 수시로 세례예식이 행해졌다. 역시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돼 동생은 그해 5월께 포도청에서 장형을 받다가 순교했고, 형은 7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됐다.

의원 집안 출신인 김종교(프란치스코, 1754~1801)는 학문에 대한 취미가 남달라 이벽(요한 세례자)조차도 "놀라운 사람"이라고 말하며 존중했다고 전해진다. 1795년 을묘박해 때 포도청에 체포돼 일시 배교했으나 1801년 8월 27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신분을 알 수 없지만 교회 책 필사에 앞장선 명도회원 정인혁(타대오, ?~1801)은 1801년 5월 14일 서소문 밖에서, 역관 명문인 천녕 현씨 가문 출신인 현계흠(플로로, 1763~1801)은 12월 10일 서소문 밖에서 각각 참수를 당했다. 양인인지, 중인인지 알 수 없지만 약방을 운영했던 김계완(시몬, ?~1802)은 1800년 박해가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피신했다가 이듬해 체포돼 1802년 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됐다. 마지막으로 서울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던 손경윤(제르바시오, 1760~1802) 회장은 1802년 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됐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2일, 방상근 석문 가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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