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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나는 믿나이다: 교회의 입문성사 - 별난 삶을 요구하는 세례, 견진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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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6 ㅣ No.277

[나는 믿나이다] 교회의 입문성사 - 별난 삶을 요구하는 세례, 견진 성사

 

 

지난 호에서 전례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몸짓이라고 하였다. 손바닥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듯이, 사랑도 서로 소통해야 열매를 맺는다. 전례도 그렇다. 하느님의 새 백성은 하느님의 뜻에 따른 삶의 결실을 거룩한 영적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하느님 사랑에 응답한다. 자기의 삶을 바치는 것만큼 완전하고 값진 소통은 없다. 그 소중한 결실을 갖고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전례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교회의 성사(전례)를 통해 우리와 변치 않을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사들은 입문성사(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치유의 성사(고해성사, 병자성사), 친교와 사명을 위한 봉사의 성사(성품성사, 혼인성사)로 구분되며, 이 모든 성사는 성체성사를 지향한다. 이번 호에서는 교회 입문 성가 가운데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세례성사를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신자들은 견진성사로 굳건하게 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51항).

 

 

세례성사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부모가 아기를 출산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 수십억 숫자에 하나를 더하는 행위가 아니다. 사랑과 생명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과 사랑은 형언할 수도 없고 측량할 수도 없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사랑과 생명을 담아 가두어둘 수 없다. 출산이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그 하나뿐인 생명과 사랑을 나누는 거룩한 행위다.

 

세례성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로, 당신의 마음에 드는 딸로 낳으시는 것과 같다. 이 성사를 통해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열매 맺으며,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딸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은 순진무구하다. 아기들의 표정과 몸짓, 얼굴과 손과 발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그 순진무구함 때문일지 모른다. 세례는 그 순진무구함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인간이 짊어진 원죄와 본죄 그리고 모든 죄벌까지도 깨끗하게 씻어주신다. 세례 때 물을 사용하는 것은 이를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혼자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사목헌장, 9항) 하셨기 때문이다.

 

여러 자식을 둔 어느 부모도 자식 하나만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집 나간 둘째아들을 기다린 것도, 잃어버린 구슬을 찾아 온 집 안을 다 뒤진 것도, 한 마리 양을 되찾아온 것도,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는 자식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 당신 생명을 나누지 않은 자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분에 걸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듯이,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느님의 자녀로서 걸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무수히 많은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거룩한 존재로 성별(聖別)되어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벗이 되어 그분과 동고동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벗은 자기의 고통을 벗에게 떠넘기거나 벗의 기쁨을 빼앗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은 같이 짊어지고, 기쁨과 영광은 얹어준다. 그 완전한 모범을 우리는 복음의 주님한테서 발견한다. 예수께서는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벗의 고통을 덜어주셨고, 벗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셨다. 그리스도인이 사귀고 섬기고 나눌 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웃이다.

 

 

세례성사 - 그리스도를 닮아 별나게 사는 사람들

 

요즘 세상에 누가 가장 보잘것없는 이웃과 사귀고, 그를 섬기고, 그와 나누려 하겠는가? 나에게 도움 될 만한 사람을 사귀어야 인맥관리가 제대로 되고, 그것이 성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세상이다. 힘 있는 사람을 섬겨야 하고, 줄을 잘 서야 출세의 길이 열린다고 믿는 세상이다. 얼마나 많은 것이 돌아올 것인지를 밤새 연구하고 받을 것이 많은 이와 나누는 것이 곧 투자인 세상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별난 사람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 세상을 사는 모습이 다른 사람하고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별난 길이 있다.

 

경제인이 있다고 하자. 그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아닌가의 차이는 흔히 성당에 다니고 안 다니는 걸로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주일만큼은 그렇다. 그러나 주일에는 대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평일에는 그리스도임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회사에서 노동자들을 불러 세워놓고 그들에게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그것이 그들이 수행해야 할 업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도대체 무엇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업의 목표라고들 한다. 일부는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노동의 존귀함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것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목표이다. 그리스도인 경제인에게 노동은 하느님의 세상 창조 사업 곧 구원역사에 참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단순하게 이윤추구의 수단으로만 보면서 하느님의 찾는 태도를 갖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정치인이 있다고 하자. 정치집단은 정치권력 쟁취를 목표로 삼는다.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정치인에게는 하느님한테서 받은 사명이 있으며, 그 사명을 수행할 때에만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다. 그 사명이란 인간의 존엄함을 증진하고 공동선을 세우는 일이다. 정치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을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로 삼는다거나 또는 존엄함과 공동선을 침해한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경제인과 정치인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나름대로 고유한 모습으로 별나게 사는 사람들이다. 별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진짜 별난 분은 사실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보잘것없는 이웃을 섬겼다. 그분은 거룩한 사제셨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극진히,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분은 진리를 드러내신 예언자이셨지만 경건하고 학식이 풍부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미움을 받으셨다.

 

얼마나 많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있는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일에 성당과 교회를 가득 채우는지 헤아리는 것조차 어렵다. 그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라면, 그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이라면, 이 사회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해야 하고, 부패할 틈도 없이 짠 맛을 내야 마땅하다. 또 얼마나 많은 십자가 불빛이 밤을 밝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만일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부패한 냄새가 곳곳에 배어 있다면, 그만큼 참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찰할 거리가 또 있다. 첫째는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한 식구가 되는 것임에도 공동체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현실이다. 새 교우는 세례를 받은 그 다음날부터 마치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의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겉으로는 공동체와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사귀고 나누고 섬기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모두가 모른 체하는 꼴이다. 세례성사의 공동체성이 실종된 것이나 다름없다.

 

둘째는 유아세례에 대한 것이다. 아기가 다 큰 다음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부모들이 있다. 신앙이란 누가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아기가 원하지 않는다고 젖을 안 먹이거나 아기가 칭얼거린다고 재우지 않는 부모는 없다. 유아세례도 마찬가지로 부모의 책임이다. 마지막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이 결합된 교회 공동체가 사귀고 섬기고 나누는 모습을 보자.

 

가난하고 힘없는 그리스도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아니 이미 세례를 받은 이들이 그들의 자리를 빼앗는다고 말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수준이 맞는 그리스도인들이 끼리끼리 나누고 사귀고 섬기기 때문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웃과 동고동락하지 않는다면 겉모습만 교회일 뿐이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단순히 마음에 드는 여러 옷 가운데 하나를 골라 입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옷을 버리고 전혀 다른 곳 곧 그리스도의 옷, 교회의 옷을 입는 것이며, 속을 완전히 비우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인호).

 

세상 한복판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어찌 그리 쉽겠는가? 별나게 사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마땅히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가 세례 때 세례명(성인의 이름)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인의 성덕의 모범을 따라 별나게 살고, 성인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느님께서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기에 우리는 기꺼이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

 

 

견진성사- 세례를 확정하고 세례의 은총을 견고하게 하는 성사

 

제자들의 처지를 그려보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주님의 벗으로서 그분의 여정에 동행할 수 있었다. 가끔은 주님의 뜻을 잘못 알아들어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동고동락하며 조금씩 주님을 닮아갈 수 있었다. 닮아갈 수 있는 스승을 곁에 모시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느닷없이 그분이 죽임을 당하셨다. 몇 차례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설마 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당황하고 불안하며 두려움에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곧 닥칠 자신들의 운명이 두려웠고 어찌해야 할지 당황했을 것이다. 느닷없이 찾아온 어둠이었을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빛이 비친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다. 그리고 성경은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하느님의 위업’(사도 2,11)을 선포하였다고 전한다.

 

오늘날 우리의 처지는 2천여 년 전 제자들의 처지와 비슷하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벗으로 삼아 그분의 길을 따라나섰다. 현실이 녹녹치 않기도 하고 이기심과 욕망과 탐욕 때문에 주님의 길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래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닮아가려고 무진 애를 쓴다.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두우시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바로 견진성사를 통해 자기 자녀들에게 성령을 계속 전해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이 여정을 지켜준다.

 

“견신성사는 우리에게 세례성사의 은총을 증가시켜 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더욱 더 뿌리내리게 해주며, 그리스도와 교회에 더욱 굳게 결합시키고, 영혼에 성령의 선물을 증대시키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인이 되게 하는 특별한 힘을 선사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268항).

 

[경향잡지, 2008년 7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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